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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7.10

명나라의 방효유는 어떤 인물인지 알려주세요.

영락제가 쿠데타를 통해 왕이되고, 건문제의 측근들을 제거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건문제의 측근임에도 불구하고 방효유라는 인물에게 인정받고 싶어했다고 하는데요.

방효유가 어떤 인물이었기에 인정받고 싶어했던 건가요?

영락제는 인정받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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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0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명나라 초기의 학자입니다.

    송염의 문하에 들어가, 뛰어난 재주로 이름을 떨쳤습니다. 1402년 연왕( 뒤의 영락제)이 황위를 찬탈한 뒤,

    그에게 즉위의 조를 기초하도록 명하자 붓을 땅에 내던지며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하였습니다.

    연왕은 노하여 그를 극형에 처하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 희직, 희고이며 호 손지, 저장성 닝하이현 출생으로 방정학 이라고도 합니다.

    송염의 문하에 들어가 뛰어난 재주로 이름을 떨쳤으며 평소부터 왕도를 밝히고 태평을 이룩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 생각했고 세속적인 일에 신경쓰지 않았으며 혜제를 섬겨 시강학사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습니다.

    1402년 연왕이 황위를 찬탈한 뒤 그에게 즉위의 조를 기초하도록 명하자 붓을 땅에 내던지며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했으며 연왕은 노하여 그를 극형에 처하였고 일족과 친우, 제자 등 847명이 연좌되어 죽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나라의 충신 이면서 굳은 절개를 지닌 사람 이였습니다. 연왕(燕王) 주체(朱棣: 永樂帝)가 거병하여 제위를 찬탈하고, 방효유에게 등극의 조서를 작성하라고 강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방효유는 그의 명령을 거절하고 "비록 10족이 주살되더라도 반란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요광효(妖廣孝)는 방효유를 죽이면 천하의 학문이 씨가 말라버린다고 영락제에게 충고했으나, 결국 영락제는 그를 책형(磔刑: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에 처하고 처자를 비롯하여 일족 800여 명을 살해했다고 합니다.조선 사육신과의 비교가 되는 데요. 방효유는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판하다 처형된 조선의 사육신과 비슷하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조선의 숙종은 노량진을 건너 사육신의 묘에 제사를 지내주었는데, 사육신은 명나라의 방효유와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고 전해 집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명나라 초기의 유학자로 절강성

    영해현 대가하진 계상방촌(현 닝보시의 일부) 출신으로 자는 희직(希直) 또는

    희고(希古) 이고 호는 손지(遜志)이며,

    중국 내에서는 기개와 절개, 충심이

    대단한 선비라고 칭찬하거나 혹은

    자신의 고집으로 인해 친족과 지인들이 무참히 처형되게 한 고지식한 선비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방효유는 영락제의 사람으로서 서로 존중을하고 신뢰하는 사이였습니다. 방효유가 영락제 정책에 안좋게 얘기를 해도 충고를 받아들였다고 전해집니다. 영락제가 명나라를 세우고 영락제의 신임으로 총관부사, 사직부사 등의 지책에 오릅니다. 오늘 날에는 영락제와 함께 명나라의 초기 기반을 다진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명나라 초기의 학자. 자는 희직(希直)•희고(希古). 호는 손지(遜志). 절강성(浙江省) 영해현(寧海縣) 출생. 방정학(方正學)이라고도 함. 송렴(宋濂)의 제자. 명나라 태조 때 한중교수(漢中敎授)가 되었으며, 촉헌왕(蜀獻王)이 초빙하여 세자(世子)의 사부(師父)가 되었는데 그의 서실(書室)을 정학(正學)이라 하여 정학선생으로 불렸음. 혜제(惠帝)를 섬겨 시강학사(侍講學士)로서 두터운 신임을 받았음. 1402년 연왕(燕王:뒤의 永樂帝)이 황위(皇位)를 찬탈한 뒤, 그에게 즉위 조서(詔書)를 기초하도록 명하자 방효유는 최질(衰絰)로 이르러 호곡(號哭)하였는데 그 소리가 전폐(殿陛)에 사무쳤다고 함. 조서를 쓰도록 거듭 요구하자 붓을 땅에 내던지며 죽음을 각오하고 거부하였음. 연왕은 노하여 그를 극형에 처하였음. 저술에 ≪주례변정(周禮辨正)≫ 등 몇 가지가 있었으나 모두 영락제에 의해 소각되고, ≪손지재집(遜志齋集)≫, ≪방정학문집(方正學文集)≫이 전함. ≪명사(明史)≫에 방효유전(方孝孺傳)이 있음.

    출처 : 한국고전용어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