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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8

일본 메이지 유신의 성립과 발달과정.

안녕하세요.

일본의 메이지 유신 체제가 성립하게 된 배경과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그리고 메이지 유신의 발달과정은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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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단정한낙지284
    단정한낙지28423.05.18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메이지 유신은 말그대로 일본에서 일어난 대규모 변혁을 말하는데. 이 변혁은 막부 체제를 해체하고 중앙 통일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왕정 복구(덴노)를 이용했습니다. 1867년에 왕정복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약 250년간 지속된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그 후에는 다양한 정치 변혁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학문적으로 이렇게 불리는 이름으로 그 당시에는 고잇신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1853년 당시 일본도 타 동양국처럼 서양 열강들의 침략이나 무역강요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쇄국체제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층이던 에도막부는 서양에 문물을 열고 받아들였는데요. 이 일을 계기로 일본 내부에서는 서양 배척 운동이 태동됩니다. 이런 때에 막부가 서양과 불평등 조약까지 맺게 되고 결국 반막부파 세력이 커지면서 권력이 메이시 덴노(일왕)에게 반환됬으며 메이지유신체제가 갖춰졌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덴노정부는 서양과 대등해지기 위해 모든체제를 서양식으로 개혁했다고 하네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53년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페리 제독이 무력으로 일본의 개항을 요구하였고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 미국을 비롯해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천황의 승인 없이 처리한 막부의 독단적 처사였으므로 반막부세력이 천황을 받들고 외세를 배격한다는 존왕양이를 내세우며 막부와 대립하고 이때 체결된 조약은 최혜국 대우, 매우 낮은 관세 등이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어서 일본 국내의 경제가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막부는 존왕양이를 지지하는 조슈번, 사쓰마번 등의 반막부세력과 무력으로 대립하나 수세에 몰려 1867년 막부의 쇼군은 천황에게 권력을 반납하는 대정봉환을 단행하지만 반막부세력은 왕정복고를 주장하며 쿠데타를 일으켰고 1868년 삼권 분립을 기초로 한 천황 중심의 지배 체제가 확립됩니다. 당시 이를 천황에 의해 새로운 세상이 되었다는 뜻의 고잇신으로 불렀고 이후 메이지 천황시기에 막부 체제가 무너지고 천황 중심의 지배체제가 확립된 사건을 유신으로 보아 메이지 유신으로 명명되었습니다.

    유신초기 자주 사용되었던 정치 사상은 양이로 후기 수호학에서 유래하는 이 상징은 동시대의 한반도에서 실행되었던 서쪽 오랑캐를 국토에서 몰아낸다는 의미로 쇄국으로의 자폐와 반대의 극에 있으며 개국 정책으로 쉽게 전화하여 혁명을 계속하기 위한 정한 등이라는 변종도 발생했습니다.

    내정며네서 공의가 널리 사용되어 당초 친번 외양의 대대명의 막부정치 참가 구상 중에 등장하지만 안정 5년 정변으로 그들이 탄압받아 조정이 조약 조인에 항의하기 위해 천하지공론을 청취하도록 요구해 전제에 대한 반대라는 의미도 획득했습니다.

    정권구상은 막부발에 천황 하에 주요 대명이 연합정권을 만든다는 형태로 수렴하였지만 왕정복이고 쿠데타에 의한 도쿠가와의 배제를 거쳐 전국에서의 관료 등용, 관사 내부에서의 공선으로 전개하고 또한 서양의 정치사상과 접합하여 의회제의 구상에 이르렀습니다.

    민선의원 설립 백서가 여론공의를 정통성 근거로 하였기 때문이며 막부 말 또한 복고 라는 상징도 등장하는데 이는 왕정복고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1862년 도쿠가와 장군은 서양식의 군제개혁을 관영이전으로 복고로서 정통화하였고 왕정복이고 시에 내걸었던 것은 신무창업이었지만 의거해야 할 제도가 없는 신화세계의 참조는 천왕의 친정이라는 원칙을 준수하는 한 서양의 제도를 임의대로 섭취할수 있다는 역설적인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막부말 10년간 원만하였던 정치체제의 변화는 왕정복고와 무진내란 후에 가속화되어 폐번치현, 미유럽에 대한 대규모 사절과 유학생의 파견, 에조치, 류큐의 내국화와 근린 제국과의 조약체결 등이 잇따라 단행되었으며 통치 신분이었던 무가의 녹봉도 해소되었습니다.

    왕족, 화족이 창설되는 한편, 기타의 신분이 피차별 신분이나 맹인을 포함해 일률 평등의 신분으로 재편성된 사실은 개혁이 막부말 정치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사회의 심부까지 미쳤으며 이러한 변혁은 몇개의 무사반란을 일으킵니다.

    유신을 이룩한 일본은 서유럽에 대한 굴욕적 태도와 달리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침략적이었고 1894년 청일전쟁 도발, 1904년 러일전쟁의 도발하고 1910년 무력으로 조선을 강제 합병해 식민지배했습니다.

    계속해서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결국 1945년 히로시마 ,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세례를 자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