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암리 학살 사건에서는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희생자들은 누구였나요?
제암리 학살 사건의 배경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제암리 학살 사건에서는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했고, 희생자들은 누구였나요? 또, 해당 사건에 관련된 가해자들이 처벌받거나 재조명을 통해 역사적으로 심판받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3.1운동 당시 일본 군대가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만행 사건입니다.
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도시오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일본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 마을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한 후 주민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합니다.
그때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 밖으로 내어놓으면서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나 일본 군경은 그 아이마저 죽였습니다.
이같은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고,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나오려 하나 모두 불타 죽었으며 이때 교회당안에서 죽은 사람이 23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입니다.
또 일제는 인근의 교회건물과 민가 등 31호에 불을 질러 살상자를 내었습니다.
제암리 학살사건으로 30여명, 고주리 학살 사건으로 40여명의 주민들이 일본군에게 잔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수촌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파악하기 위해 수촌리로 가던 스코필드가 제암리에서도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상황을 파악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제암리 학살 사건이 알려져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자 일본은 제암리 학살을 지휘한 아리타 중위에게 30일의 중근신 처분만 내리고 사태를 덮으려했으나 이 사건이 전세계적으로 알려져 일본에 대한 세계의 여론은 안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일본은 아리타 중위가 미숙하고 주민들이 저항하여 우발적으로 사건이 발생했다 주장, 후일 김완섭은 당시 조선 땅에 일본군이 없었는데 어떤 일본군이 학살을 하나? 주장해 논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 주둔 일본 육군이 조선군이라는 이름으로 주둔했으며, 이 중 헌병 병력 일부는 일반 치안 임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주둔군 사령관인 우쓰노미야 다로 장군의 일기가 발견되면서 일본이 제암리에서 벌어진 학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관여한 군인들은 30일간 근신처분을 받았으나 후에 군법회의 결과 살인, 방화에 대해 무죄 처분을 받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일본군이 제암리에서 주민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한 사건입니다.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확신되자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에서도 마을 청년들을 중심으로 만세 운동을 주도해갔습니다. 일본 경찰은 총칼을 앞세워 무력으로 잔인하게 진압했으나 이후에도 장날에 만세를 부르고 봉화를 올리는 등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에 4월 5일에 있었던 무력진압에 대해 사과한다는 핑계로 15세 이상 남자들을 제암리교회로 모이게 합니다. 4월 15일 교회당에 사람들이 모이자 일본군경들은 교회당 문을 잠그고 불을 질렀습니다. 불을 피해 나온 사람들은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그뿐만 이니라 일본군은 이웃 고주리 마을까지 가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이런 결과 제암리에서 30명 고주리에서 40명이 희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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