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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7

효종의 북벌론이 실패한 이유와 그의 주업적은 무엇인가요?

아주 오래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효종의 북벌론에 대해 배웠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효종의 북벌론이 실패한 이유와 그의 주업적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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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현세자의 급서 이후 정통성에 논란이 있는 채로 등극한 효종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추락한 국왕의 위엄을 되찾고 정국 주도력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의도 속에서 친청파를 제거하고 이른바 산당(山黨) 세력들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반면 척화 계열로서 병자호란 후 낙향해 있던 산당 세력들은 다시 정계에 복귀할 정치적 명분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양자의 정치적 이해를 함께 충족시킬 수 있는 상징적 구호로서도 북벌론이 대두할 수 있었다. 효종의 북벌 의지 표명은 손상된 조선 국왕의 위엄이 회복되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새 조정에 대한 산당의 출사 명분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북벌론은 효종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의 북벌계획으로 구체화되었다.

    효종은 원두표와 이완 등 친위 세력을 중용함으로써 군비 확충을 주도하였다. 구체적인 사례로는 수어청 개혁을 통한 남한산성 군사력 보강, 어영청의 확대 개편, 어영청 내 대포부대 창설, 금군의 편제 개편 및 확충, 영장제 실시, 영장의 삼남 파견, 강화도 해안가 진보(鎭堡) 설치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시책들은 대개 중앙군 강화에 치중되었거나 방어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효종의 북벌계획은 국왕의 정국 주도라는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인 성격을 함께 지녔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또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청나라가 조선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었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유의미한 공세적 성격의 계획 수립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으며, 거듭된 자연재해와 흉년으로 인해 경제적인 여력도 부족하였다.

    효종 즉위 직후인 1649년에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에서 북벌의 당위성을 설파하면서도 시세와 우리의 강약을 살피고 청나라의 틈을 엿보면서 서서히 북벌을 준비하자고 하였던 것은 이런 사정을 송시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시열이 보기에도 좀 더 시급한 것은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종의 강력한 의지로 추진되던 북벌계획은 재위 후반기에 들면서 백성들의 궁핍과 불만, 문 · 무신 간의 갈등, 김육을 비롯한 실무 관료들의 강력한 반대까지 일으키면서 효종을 정치적인 고립 상태로 몰아넣었고, 북벌계획의 추진 동력은 점차로 상실되었다. 효종은 중망(衆望)을 받던 송시열을 중용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했지만, 곧이어 효종이 승하하자 북벌계획은 중단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북벌계획 [北伐計劃]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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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27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올바른 금융지식을 전도 / 상식에 도전 / 지식의 나눔"이라는 숭고한 가치하에 질문자님께 드리는 모든 답변을 직접 "수기"로 작성합니다. 좀 길더라도 끝까지 읽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


    효종(재위 1649 ~1659)의 대표적인 업적은 북벌입니다. 청에 당한 수모를 갚자 라는 기치하에 북벌을 주장하여 실제로 군사를 양성하는 등 노력을 하였습니다. (* 물론, 이 북벌이 실제로 이행되지는 못하였으며, 효종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사상적 기반에 지나지 않았다고도 봅니다.)


    또한, "양송"이라 불리는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을 등용하여 산림정치의 포문을 개척했으며, 2차례에 걸친 나선정벌에 군대를 파견하는 등 주로 군사적 업적을 많이 남겼다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새로운 역법을 제정하기도 하는 등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어느정도 기여하였습니다.


    (TesTia의 마지막 한마디) 효종의 경우는 "정통성 문제"에 꾸준히 시달렸던 왕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재위 10년 만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북벌을 비롯한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효종(봉림대군)의 경우는.. 그냥 대군으로 편히 여생을 보내는 것이 더 나았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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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효종이 1659년 급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면서 동력을 잃어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효종은 이 북벌을 내세워 청나라에 대한 보다 강력한 군사적 의지를 다졌다는 점이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라면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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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첫 번째 이유는 기득권층인 조선 사대부들의 실질적인 참여가 없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효종의 아버지인 인조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선 전기와 후기를 가르는 친명배금 정책을 표방하는 서인 정권에 의해 왕위에 오른다.

    -출처:월드코리안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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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효종의 북벌론이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아무래도 기득권층인 조선 사대부들의 북벌에 대한 소극적인 자세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의 내용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https://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39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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