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이후에도 조선의 집권층이나 유학자들 중에는 여전히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조선은 문화가 높지만 청은 문화가 낮은 야만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들은 병자호란 때 오랑캐인 청을 황제의 나라로 받들겠다는 약속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따라서 부끄러움을 씻어내기 위해서라도 청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북벌론이라고 한다. ‘북’은 곧 조선의 북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청을 가리킨다.
특히 병자호란 때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귀국한 봉림 대군(효종)은 북벌에 대한 의지가 컸다. 그는 아버지인 인조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북벌 준비에 들어갔다.
당시 청에 대해 강경론을 펴던 송시열, 이완, 김집 등을 관리로 등용했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발표했다. 남한산성과 수어청을 새롭게 정비하고, 중앙군의 수를 1만 명으로 늘리기도 했다.
당시 바다에서 길을 잃고 표류하다 조선에 흘러들어 온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 군사 지식을 갖고 있음을 안 뒤에는 그를 시켜 조총을 개량하게 했다.
효종은 10년 동안 10만 명의 군사를 길러 준비한 뒤 청을 정벌하자고 했지만 모든 신하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임금의 권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것을 염려한 신하들, 북벌 준비로 인해 백성들의 부담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신하들은 북벌론에 반대했다.
하지만 신하들이 반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효종의 북벌론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계획이었다. 청은 이미 명에 이어 중국 전체를 지배하는 강한 나라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출처 : 한국사 사전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