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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
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23.07.05

인조반정이 일어난 이유는 어떤거죠?

조선시대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역사적 사건중에 임금을 바꾼 사건은 흔치 않은데요 그중 인조반정이 대표적인데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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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반정의 주요 명분은 적통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저지른 것과

    중립외교라는 정책으로 명나라에대한 의를 저버렸다는 명분으로 인조반정이 일어났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0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반정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형과 동생, 조카 등을 무고하게 죽여 인륜을 해쳤다는 점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동복형인 임해군이 사병을 키우고 역모를 꾀했다는 등의 이유로 유배하였다가 교동의 위소에서 죽였습니다.

    -폐정은 지나친 토목공사와 인사의 파행으로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것이었다고 합니다. 광해군은 창덕궁, 창경궁을 중건하고 종묘를 중건한 것 외에 이후 새로이 경복궁 서쪽에 인경궁을, 새문동에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을 연이어 건설하여 토목공사가 끊이질 않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측근들과 측근들의 요청 및 뇌물 등에 따른 파행적인 인사와 지나친 부역과 세금으로 민생을 망가뜨렸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명은 임진왜란 당시 원병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한 재조의 은혜가 있는 나라인데 명의 요청에도 파병을 주저하고 1619년(광해군 11) 사르후 전투(일명 심하의 전투)에서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투항하는 등 명을 배신하는 행위를 함으로써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 같은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원병을 보내는 문제에서만큼은 이이첨마저도 춘추의 대의를 말할 정도로 비판적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은 즉위 직후 정세 변화에 따라 왕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동복형 임해군과 유일한 적통 영창대군을 경계합니다.

    먼저 임해군이 불궤를 꿰했다는 죄목으로 진도로 귀양보냈다가 다시 교동으로 옮겼고 그 뒤 대북파 정인홍, 이이첨 등이 임해군의 처형을 주장하자 이원익, 이항복 등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감 이직에게 살해하게 했습니다.

    칠서지옥을 일으키고 이를 계기로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영창대군을 강화에 유폐, 선왕의 유교칠신 중 재직자인 신흠, 작동량, 서성, 한준겸을 내쫓습니다.

    이어 영창대군을 처형하라는 주장이 일어나자 이이첨의 뜻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이 8세 어린 영창대군을 살해,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 전을 교동에 금고했다가 살해합니다.

    대비 김씨에 대해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중 1617년 폐모론이 대두되었고 영중추부사 이항복, 영의정 기자헌 및 정홍익, 김덕함 등이 반대하자 이들을 멀리 귀양보냈습니다.

    그 뒤 우의정 한효순의 발론을 계기로 대비 김씨의 존호를 폐해 다만 서궁이라 칭하고 공봉을 감하고 조알을 중지합니다.

    그 뒤에도 실권을 행사하던 이이첨은 1622년 12월 강원감사 백대형을 시켜 이위경 등과 함께 굿을 빙자해 경운궁에 들어가 대비를 시해하려 하나 영의정 박승종 등이 급히 이르러 추방해 실패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폐모살제 등의 사건은 지금까지 대북파에 눌려 지내던 서인 일파에게 반동 투쟁의 중요한 구실을 주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반정은 1623년(광해군 15) 이귀·김유 등 등 서인 일파가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조선 제16대 왕에 등극)에 앉힌 반정사건을 말한다.


    조선의 역사상 성공한 반정은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이 있다. 광해군은 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왕권의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에 광해군은 1613년 왕위를 위협하던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면서 왕권의 위협 요소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특히 광해군은 중립외교로 후금과 평화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는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세력의 불만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계축옥사(1613년 대북파가 영창대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옥사) 당시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났던 서인들은 사림세력의 이러한 불만을 이용해 반정을 일으키게 되었다.


    반정군이 궁내로 진입하자 광해군은 달아나 의관이던 안국신의 집에 숨었으나 곧 붙잡혔고, 군(君)으로 강등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여기에 반정군은 고관대작 40여 명을 참수하고, 200여 명을 귀양보냈다. 그리고 이후 경운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존호를 회복시켜준 뒤에 그 권위를 빌어서 인조가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서인세력은 반정의 주역으로서 정국을 주도하며 왕권을 제약하였고, 광해군 때의 중립외교정책을 패륜으로 비판하면서 친명배금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후금을 자극하였고, 결국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


  • 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해군의 독재 통치와 서인과 남인 간의 파벌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광해군은 세종 이후 최초로 외척이 왕위에 오른 인물로, 본인의 친척과 신하를 중심으로 정권을 운영하면서 서인과 남인을 소외시켰습니다. 그리고 광해군은 명나라에 우호적인 정책을 추구했는데 명나라로 부터 받은 호칭인 '광해군'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서인과 남인은 이를 조선의 독립성을 훼손한다고 비판했구요. 그래서 서인과 남인은 광해군을 제거하고 그의 조카이자 손자인 인조를 왕으로 세워 조선을 정상화 시키고자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인조반정은 1623년 4월 11일에 일어난 사건으로, 김류, 이귀, 신경진, 이서 등 서인파라 불리는 파벌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이종을 왕으로 올린 사건을 말합니다. 이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폐정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습니다. 이 세력들이 주장한 이유가 있는데요.

    첫번째는 광해군이 여러 차례의 옥사를 일으켜 형제, 조카 등을 무고하게 죽여 인륜을 해쳤다는 주장입니다. 특히 1613년에는 계축옥사로 광해군의 외할아버지인 김제남을 죽이고 외할아버지의 손자인 영창대군을 강화로 추방한 일이 있었습니다.

    둘째로는 북인세력의 권력 독점에 불만을 품은것으로 인조반정의 진짜 원인으로 추측됩니다. 북인파는 광해군의 독재적인 통치에 대한 반발로 인조반정을 계획하고 실시했는데, 이들은 서인파를 배제하고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권력을 잡고자 했습니다.

    결국 인조반정은 조선시대의 정치적인 갈등과 권력 싸움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이종을 영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정권의 변동과 분쟁을 일으키는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