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는 영조 당시 세자로 1762년 뒤주에 갇혀 죽게 됩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정신병 : 혜경궁 홍씨가 남긴 <한중록>에 의하면 그는 정신병과 폭력적인 행동을 일삼았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영조의 미움을 받아 죽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정치적 희생 : 사도 세자는 당시 붕당정치의 희생양이라고도 합니다. 그 이유는 경종의 죽음과 관련하여 독살설이 나돌았으며, 영조와 노론이 배후라는 주장입니다. 영조 4년 1728년 이인좌이 난을 일으킨 이유에서도 반증합니다. 소론과 가깝게 지낸 사도 세자가 향후 왕이 되면 노론에게 위협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경언의 10개 고변에 따라 사도세자의 죽음을 앞 당깁니다.
개혁 추진에 대한 보수 반발 :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추진하면서 서양의 진보 사상을 받아 들여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보수 세력의 반발과 두려움이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임오화변으로 희생된 사도세잔의 죽음에 대한 의문은 많습니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세자가 죽고 나서 '사도'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로 영조 자신도 안타까울 정도로 정치적 희생의 비중이 클 것으로 판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