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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좋아요 감사합니다!!23.05.15

조선시대 과학자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장영실이 지금까지도 조선 최고의 과학자라 불리는 이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장영실을 제외하고는 그와 견줄만한 과학자가 있었는지 질문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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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과학사학자들에 따르면 장영실이 노비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이순지와 이천’을 꼽았다. 이 중 이천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과학기술자다.


    특이하게도 이천은 원래 학자가 아닌 ‘무인’ 출신이다. 그는 고려말 1376년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시절에 무과 급제해 10대 후반에 무인의 길에 들어섰다. 무인이던 그가 태종, 정종 때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과학기술자로 나서게 됐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종 때의 기록은 잘 남아 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던 해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이 제기를 눈여겨본 세종은 곧바로 이천을 불렀다.


    세종은 이천이 쇠를 다루는 천재적인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고,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


    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도 바로 이천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정인지와 정초가 설계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만드는 일을 이천이 담당해 훌륭한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학계에서 평가받는데, 이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다. 천문 관측 기기 제작에 대한 이천의 업적은 금속활자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밑바탕이 된 도량형의 표준화도 그가 이룩한 중요 성과다. 그는 저울을 개량해 전국 관청에 나눠줬다. 이 저울은 전국 관청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등 다양하게 사용돼 저울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였다.


    이천은 도성을 쌓는 건축술, 군선이나 화포 개량 같은 군사 분야, 하물며 악기 제조에까지 그의 기술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하고자 선체가 크면서도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을, 물에 잠기는 부분이 썩지 않도록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인 갑조법을 개발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지내면서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박연과 더불어 금, 솔, 대쟁, 아쟁, 생, 우회 등 많은 악기를 만들고, 무희와 악공들의 관복을 제도화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렇게 이천은 수많은 발명품 뒤에서 뛰어난 기술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종 1년인 145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 놀라운 기술력을 지녔던 천재적인 과학기술자 이천, 그는 ‘갑옷 입은 과학기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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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5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천재 과학자 장영실 이외에도 이순지, 정초, 이천 등이 있었습니다.

    이순지(1406~1465)
    * 특기 : 뛰어난 계산 능력과 천문학 지식을 지님.
    * 업적
    - 우리나라 최초의 달력 <칠정산 내·외편> 집필
    - 천문 관측 기구 안내서인 <제가 역상집> 집필
    - 간의, 혼천의, 보루각 발명의 이론적 자료 제공.

    정초(? ~ 1434)
    * 특징 : 엘리트 집안 출신의 학자.
    * 특기 :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며 무엇이든 한 번 보면 모두 외워버리는 천재. 문장력이 뛰어나고 글을 잘 썼음.
    * 업적 : 조선 최초의 농사책 <농사직설> 집필.

    이천(1376 ~ 1451)
    * 특징 : 무과에 급제한 무관 출신 과학자.
    * 특기 : 쇠를 다루는 능력이 탁월하여 조선의 활자 인쇄술 발전에 크게 기여함.
    * 업적 : 무기·군함 개량, 금속 활자 경자자·갑인자 제작, 천문 기구 제작 등에 참여 함.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의 천재 과학자 (천재학습백과 초등 우등생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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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 역사를 통털어 시대 전체를 통 털어 약 30여명의 과학자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는 장영실, 홍대용, 정약전, 김정호 등 조선시대 인물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중 장영실과 비교 할만한 인물은 바로 영조 때의 홍대용 입니다. 『담헌서』, 『의산문답』, 「연기」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자 실학자입니다.

    수차례 과거에 실패한 뒤 음보로 관직에 진출했으며, 과학사상가로서 유명합니다. 연행사의 일원으로 북경을 방문해 중국의 학자·서양선교사들과 교유하면서 서양문물에 접하고 큰 영향을 받았고 지구는 둥글다는 이론을 주장한 학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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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과학자 이민철은 본관은 전주(全州).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서자이다. 1646년(인조 24) 아버지가 진도에 유배되었을 때 그 곳에 따라가 아버지로부터 『서경(書經)』의 선기옥형(璿璣玉衡 : 해시계)과 혼천의법(渾天儀法) 등을 배워 천문의기에 대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자격루(自擊漏)·혼천시계 등을 만들어 아버지를 위로하면서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던 그는 1648년 전력부위(展力副尉)라는 종9품의 잡직으로 벼슬길에 올랐지만, 말단 벼슬을 탓하지 않고 오직 과학하는 것으로 삶의 보람을 찾으려 하였다.

    1664년(현종 5) 왕명으로 관상감에 들어가 송이영(宋以穎)의 도움을 받으며 여러 누국(漏局)의 천문시계들을 개조하여 1666년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크게 승진, 이때부터 과학자로서의 위치가 뚜렷해졌다.

    1669년에는 세종 이래의 전통을 계승한 새로운 수격식(水激式) 선기옥형을 제작하였는데, 이 천문시계에는 사유옥형(四遊玉衡) 대신 지구의(地球儀)를 남북의 두 극축(極軸)에 연결하여 혼천의의 중심에 넣음으로써 지전설(地轉說)을 입증하였다.

    이 천문시계는 송이영이 만든 추동식(錘動式) 기계장치의 천문시계와 함께 조선과학사의 뚜렷한 업적으로 남았다. 이 공로로 1674년에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680년(숙종 6)에 이주첨사(伊州僉使)·이성현감(利城縣監)·영월군수·동지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687년에는 현종대에 만들었던 선기옥형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기 시작하여 그 다음 해 5월에 완성,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남쪽에 제정각(齊政閣)을 지어 이를 설치하였다. 또한, 1683년에는 성능이 좋은 수차를 만들어 관개에 이용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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