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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06.14

조선시대 관료 복장의 흉배에 쓰인 문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사극 드라마를 보면은

왕이나 관료의 옷에 흉배라는 것이 사용 된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여기에 쓰인 문양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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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흉배는 국가 가치관과 덕목을 아름답게 표현한 종합예술의 일환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흉배는 관복에 수놓은 천을 부착하여 계급의 차이를 나타내는 역할을 수행했는데요, 이는 그저 계급의 상징뿐만 아니라, 문양과 장식성을 통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유교적 가치를 상기시키는 의미도 담고 있었습니다.

    흉배에 사용된 문양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요.

    구름 : 천하를 일구는 것을 상징

    여의주 : 부귀와 풍요를 상징

    물결 : 바다와 강을 상징하여 그 힘과 굳건함을 나타냄

    바위 : 견고함과 굳세어진 정신을 상징

    물방울 : 깨끗함과 순수함을 상징

    꽃 :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상징

    이러한 흉배의 문양들은 관리들이 입은 관복을 통해 조선시대의 국가 비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유교적 덕목을 되새기며 치국평천하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관료들은 자신의 지위와 책임을 느끼며 국가와 사회에 봉사하는 의식과 의지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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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물이 2마리인 흉배는 당상관 (정3품 이상) 만, 1마리인 흉배는 당하관 (정3품 미만) 만 해당이 되며,

    문관은 학, 무관은 호랑이가 수놓아진 흉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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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쌍학흉배는 밝은 녹색을 바탕으로 단정학과 오색구름을 세필로 화려하게 그렸고, 삽화금대도 정교하게 묘사하였다. 짙은 먹으로 묘사된 교의를 덮고 있는 표범가죽은 가늘고 구불구불한 선으로 사실적으로 그렸다. 정형화된 공신도상으로부터 보다 자연스러운 형식으로 변모하던 18세기 초엽의 정교한 작품으로 중요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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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흉배는 조선시대에만 있었던 것으로, 그 문양에 따라 품계를 나타내었는데, 특히 왕족이 사용하는 것은 보(補)라 하였다. 왕과 왕세자는 용무늬[龍文]를 수놓은 원형의 보를 가슴과 등, 그리고 양어깨에 붙였다.


    용의 발톱수에 따라 오조룡(五爪龍)·사조룡(四爪龍)·삼조룡(三爪龍)으로 구별하여, 왕과 왕비는 오조룡보, 왕세자와 세자빈은 사조룡보, 왕세손은 삼조룡보를 사용하였다. 흉배는 관복과 같은 색의 비단에 다양한 문양을 면밀하게 수놓아 관복을 아름답게 장식해 주며, 또한 상하의 계급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구실을 하였다.


    계급의 표시가 되는 주도안을 중심으로, 구름·여의주·파도·바위·물결·불로초·물방울·꽃·모란·완자·당초·칠보·보전·해·달·물고기·불수(佛手)·서각(犀角)·산·지초(芝草)·장생 등을 수놓았다. 또한, 유물에 보면 주도안을 따로 만들어 그 동물만 갈아 붙이면 품계를 나타낼 수 있었다.


    이것은 흉배 하나에도 실용성을 꾀하였기 때문인데, 이것은 자수가 단시일에 될 수 없다는 어려움을 시사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흉배의 제정에 관하여 처음으로 논의가 있었던 것은 1446년(세종 28)이었다. 이 때 우의정 하연(河演)과 우참찬 정인지(鄭麟趾)가 흉배를 제정하여 관복의 등위와 존비를 가리자고 하였다.


    그러나 영의정 황희(黃喜)는 “검박(儉朴)을 숭상하고 사미(奢靡)를 억제하는 것이 정치의 급선무인데 국가가 문승(文勝)의 폐가 있는 듯하여 항상 염려가 된다. 단자사라(緞子紗羅)는 우리 나라의 산물이 아니다. 또 존비등위는 금은각대(金銀角帶)로 정하고 있으니 흉배를 하여야만 할 이유가 없다.”고 반대하여 흉배제정을 그만두었다.


    그 뒤 1454년(단종 2) 양성지(梁誠之)의 건의에 따라 문무관 3품 이상의 상복에 흉배를 붙이게 되었다. 즉, 대군은 기린, 도통사(都統使)는 사자, 왕자군(王子君)은 백택(白澤), 대사헌은 해치(獬豸), 문관 1품은 공작, 2품은 운학(雲鶴), 3품은 백한(白鷳), 무관 1·2품은 호표(虎豹), 3품은 웅비(熊羆)를 달도록 정하였다.


    이것은 명나라의 홍무예제(洪武禮制)를 본뜬 것인데, 시행 도중 명나라 사신과의 구별이 어려워 불편하니 개혁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뚜렷한 개혁은 없었다. 1505년(연산군 11)에는 1품에서 9품까지 모두 흉배를 사용하게 되었고, 또한 사용된 문양도 명나라와는 전혀 다른 사슴·돼지·거위·기러기 등의 독특한 문양을 사용하는 자주성을 보였다.


    그러나 이 때의 흉배 제도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혼란이 생겨서인지 무신의 흉배에 비금(飛禽)을 혼용하지 못하도록 금하자는 기록이 보인다. 1734년(영조 10)에 와서는 간편하게 문관 당상관은 운학흉배, 당하관은 백학흉배를 사용하게 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문관 당상관은 쌍학(雙鶴), 당하관은 단학(單鶴), 무관 당상관은 쌍호(雙虎), 당하관은 단호(單虎)를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 제도는 1910년까지 시행되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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