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은 어땠나요?
고종황제께서 네덜란드 헤이그 특사를 파견했던 당시 우리나라의 역사적 상황은 어땠나요?그리고 이준 선생과 함께 가셨던 특사 한 분(존함이 기억나지않음) 이 특사 두분은 그 이후 어찌되셨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헤이그특사사건은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일제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 활동이다. 고종은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을 인준하지 않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만국평화회의 주창자인 러시아 황제가 극비리에 초청장을 보내자 특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회의참석은 거부됐고 신문기자단 국제협회에서 발언 기회를 얻어 한국의 처지를 알렸다. 회의참석 거부에 통분한 이준은 순국으로 생을 마감했다.
일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도발 이후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미국 · 영국 · 독일 · 프랑스 등 구미 열강이 일제의 한국 침략을 묵인하도록 조처한 뒤, 1905년 11월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보호국’으로 삼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이 조약을 인준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친서를 국외로 내보냈다. 미국의 헐버트(Hulbert, H. B.) 박사에게 전보를 보내 그 곳에서 조약 반대운동을 벌이게 한 것도 이 즈음의 일이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헤이그특사사건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상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 1907년에 이상설, 이위종, 이준,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를 특사로 헤이그에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대한제국 특사들이 회의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특사들은 현지 언론을 대상으로 을사늑약의 무효와 일본의 침략상을 고발하였습니다. 한편 이준은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현지에서 사망했습니다.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종황제는 1905년 이뤄진 을사조약(을사늑약)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맺어진 조약임을 알리고자 이상설 이준 그리고 러시아 공사관인 이위종을 헤이그에 비밀리 특사로 파견합니다. 헤이그에서 개최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이들 중 이위종은 영어불어 러시아어 등에 능통하여 한국국민을 위하여라는 연설을 통해 을사조약이 부당하게 맺어진 조약이며 일제가 강제로 외교권을 찬탈했음을 알리고자 노력했지만 만국평화회의(큰도둑들의 모임)에서는 귀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이준열사는 분사함으로써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킴으로써 광무에서 융희로 연호도 바뀌게 되는 등 변화가 생깁니다. 일제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차관정치를 행하는 등 조선 침략의 야욕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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