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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7.20

조선 전기의 권신인 한명회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조선 초 세조~성종 시대 최고의 권신으로 불렸던 한명회의 호는 압구정이었다고 합니다.


심지어 두 왕의 장인어른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한명회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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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 청주, 자 자준, 호 압구정, 사우당, 시호 충성, 장순왕후, 공혜왕후의 아버지 입니다. 그의 조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명나라에 가서 조선 이라는 국호를 받고 돌아온 한상질이며 부친은 한기 입니다.

    젊어서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자 나이 40세가 다되어 1452년 음보로 경덕궁직을 얻었으며 친구인 교리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무리에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 양정 등 30여명을 추천하고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습니다. 군기녹사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소윤에 오릅니다.

    1454년 동부승지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 그 해 좌익공신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에 적극 가담하여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습니다.

    1457년 이조판서가 되고 상당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치보다 병권에 재능을 보였으며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을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으며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더 두터워졌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 이듬해 우의정이 되고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어 병으로 한때 물러났습니다.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반역했다고하여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고 다음해 세조가 죽고 이 해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올랐고 1469년 영의정에 복직, 불편한 관계였던 예종이 갑자기 죽고 막내사위인 성종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대신해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이 되어 서정을 결재, 이때도 병권에 관심이 높아 병조판서를 겸하였고 그의 세도는 절정에 이릅니다.

    1471년 좌리공신 1등이 되고, 그 해 춘추관영사에 이르렀으며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추락, 성종 5년 영의정과 병조판서 해임 ,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습니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윤비 사사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는 토막내어졌으며 몸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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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명회는 조선전기 삼정승, 즉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다 한번씩 역임한 문신입니다. 1415년(태종 15)에 태어나 1487년(성종 18)에 사망했는데 과거에 실패하고 문음으로 관직에 진출했다고 합니다.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심복으로 활약했고 세조 즉위 후 사육신 주살에 적극 협조한 공 등으로 영의정에 올랐고 세조 사후 원상으로서 어린 왕을 보필하며 국정을 운영했고, 예종과 성종에게 딸을 왕비로 들어보내 권세와 부를 누렸다고 합니다. 성종 때 성균관 장서 확충의 공을 세우기도 했으나 갑자사화 때 연산군 생모 폐사에 관여했다 하여 부관 참시되었다가 뒤에 신원이 복원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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