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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8

예문관은 무슨 기능을 하는 기관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예문관은 과거에 무슨 역할을 하능 기관이었나요?


예문관이 설치된 시기는 언제이며


그 당시 시대적 배경은 어떠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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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전기에는 고려 말기의 제도를 수용하여 예문춘추관에서 교명과 국사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가, 1401년(태종 1)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하였다. 1456년(세조 2) 집현전이 혁파된 뒤, 집현전에서 수행하던 인재 양성과 학술적인 기능을 일부 대행하도록 하였다. 1462년(세조 8) 겸예문관직(兼藝文館職)의 설치는 이러한 일을 수행할 목적으로, 젊고 유능한 문신들에게 학문에 정진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1470년(성종 1) 이전의 집현전 직제 중 정3품 부제학에서 종6품 부수찬에 이르는 관직이 증설되면서, 과거 집현전과 예문관의 복합적인 기관으로 변하였다. 1478년(성종 9) 2월 집현전의 정7품 박사에서 정9품 정자에 이르는 관직이 마련되어 집현전과 예문관의 완전한 복합체가 되었다. 이로 인한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1478년 3월 예문관에 중첩 설치되었던 집현전의 옛 직제는 홍문관으로 이관되고 예문관은 종래의 기능을 수행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392년(태조 1) 7월 건국 직후에 직제를 반포한 교서에서 ‘교명과 국사를 논의하는 일을 맡은 관서’로 예문춘추관제가 발표되었다. 예문춘추관은 왕의 명령을 짓는 일과 국사를 논의하는 두 가지 다른 기능뿐만 아니라 직제도 예문관과 춘추관이 혼성된 것이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1401년 7월의 관제 개혁에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다시 분리되었고, 예문관은 녹관(祿官) 즉 현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녹봉을 받던 벼슬아치로, 춘추관은 겸관(兼官)으로 충원하였다. 직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춘추관에는 영춘추관사 1명, 지춘추관사 1명, 동지춘추관사 2명, 편수관·기주관·기사관을 두었고, 기사관은 예문관의 봉교·대교·검열 등이 수행하였다(『태종실록』 1년 7월 13일).

    한편 1393년 9월 14일 경·외 모든 아문에서 중요한 자료를 춘추관에 보고하도록 법제화하였고, 이는 『원육전(元六典)』의 규정으로 법제화되었다. 왕이 정무를 집행할 때에 그와 관련된 내용 가운데 역사에 남을 만한 자료를 사관이 추려 적은 시정기(時政記)의 기록에 대한 논의가 더욱 확대되어 확정된 시기는 1434년(세종 16)으로, 시정기의 구체적 내용이 왕의 재가를 받아 법제화되면서부터이다. 예문관 역시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일을 하였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경·외의 대소 관서로 하여금 시행하는 일을 기록하여 춘추관에 보내도록 하였는데 사헌부·의금부·예조의 기록은 부실하고 각 관청은 보내지 않으니 이를 시행토록 할 것. ②이조·병조·예조·경연·사헌부·승문원 등에도 기록을 담당하는 일을 낭청 1명에게 겸임하게 할 것. ③예문관 직제학의 감독 아래 직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 아문의 문서를 연월의 순서대로 정리하여 시정기를 만들 것. ④대간의 상소와 신하들의 상서로 아뢴 일을 기사관으로 하여금 기록하여 바치게 할 것. ⑤외국에 사신으로 나간 사람은 국가와 군민에 관계되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서장관이 기록하는 예에 따라 상세히 기록하여 바칠 것. ⑥사관은 견문한 바를 기록하여 간직하였다가 바칠 것. ⑦시정기는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비치하여 두고 정해진 해에 포쇄(曝曬) 즉 젖거나 습기 찬 것을 바람에 쏘이고 햇볕에 말리게 할 것.

    출처: 위키실록사전 예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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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정한낙지284
    단정한낙지28423.05.28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예문관이라는 행정 및 연구 기관이 있었습니다. 예문관은 조선시대 국왕의 말이나 명령(칙령과 교명)을 담은 문서를 기록하는 역할을 맡아온 관서인데요.

    1401년에 태종1년에 설립된 이 기관은 집현전에서 수행되던 인재 양성과 학술적인 업무 일부를 계승하였습니다. 이 제도는 젊고 능력있던 문신들이 예문관의 역할을 겸하게 하여 학문에 힘쓰도록 하기 위함으로 보입니.

    1470년에는 예문관 내에 부수찬(종6품)에 이르는 관직이 더 추가되어 집현전과 예문관의 기능을 통합한 복합적인 기관이 되었습니다.

    이후 1478년에는 구 집현전 직제가 홍문관으로 이관되고, 예문관은 종래의 예문관으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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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문관의 사초는 왕과 신하들의 말들을 기록한것이고

    승정원일기는 왕과 신하들 사이의 의견을 조절하고 소통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비서관같은 일을 맡는 곳으로 이런 업무를 기록으로

    적은일기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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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원봉성(元鳳省)·사림원(詞林院)·문한서(文翰署)·한림원(翰林院)이라고도 한다. 4관(館) 또는 관각(館閣)의 하나이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 말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예문춘추관을 두어 교명(敎命)과 국사(國史)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401년(태종 1)에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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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입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 말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예문춘추관을 두어 교명(敎命)과 국사(國史)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1401년(태종 1)에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 독립되었다고 합니다. 1470년(성종 1)에 이르러 예문관에는 이전 집현전 직제에서의 부제학(정3품 당상관)에서 부수찬(종6품)에 이르는 관직이 더 설치되었다. 이로써 예문관은 과거 집현전과 예문관의 복합적인 기관으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예문관은 이렇듯 조선 초기에 왕권 강화를 위한 왕이 직접 국사를 돌보기 위한 보조하는 기관이자 왕권을 강력 하게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기관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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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국왕의 말이나 명령을 담은 문서의 작성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입니다. 원봉성(元鳳省)·사림원(詞林院)·문한서(文翰署)·한림원(翰林院)이라고도 합니다. 4관(館) 또는 관각(館閣)의 하나입니다. 조선 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 말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예문춘추관을 두어 교명(敎命)과 국사(國史)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1401년(태종 1)에 다시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분리, 독립되었습니다.


    그 뒤 1456년(세조 2) 세조에 의해 집현전이 혁파된 뒤, 집현전에서 수행하던 인재 양성과 학술적인 기능을 예문관에서 일부 대행하기도 하였습니다. 1462년에 설치한 ‘겸예문관직(兼藝文館職)’의 제도도 그러한 목적에서 생긴 것이었습니다. 이 제도는 젊고 유능한 문신들로 예문관의 직을 겸하게 해 학문에 힘쓰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470년(성종 1)에 이르러 예문관에는 이전 집현전 직제에서의 부제학(정3품 당상관)에서 부수찬(종6품)에 이르는 관직이 더 설치되었습니다. 이로써 예문관은 과거 집현전과 예문관의 복합적인 기관으로 변하였습니다.


    1478년 2월 과거 집현전의 박사(정7품)에서 정자(正字, 정9품)에 이르는 관직까지 가설되어 예문관은 집현전과 예문관의 완전한 복합체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문제점이 논의되어 1478년 3월, 비로소 예문관에 중첩 설치되었던 구 집현전 직제는 홍문관으로 이관되고 예문관은 종래의 예문관으로 돌아갔습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직제에 따르면, 영사(領事, 정1품, 의정이 겸임) 1인, 대제학(정2품) 1인, 제학(提學, 종2품) 1인, 직제학(정3품) 1인, 응교(應敎, 정4품, 홍문관 직제학,교리 중에서 택해 겸하게 함.) 1인, 봉교(奉敎, 정7품) 2인, 대교(待敎, 정8품) 2인, 검열(檢閱, 정9품) 4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중 제학 이상은 겸관(兼官)이며 직제학은 도승지가 겸하고 응교는 홍문관의 관원이 겸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예문관의 전임관(專任官)은 봉교 이하가 되었습니다.


    대제학은 나라의 문한(文翰)을 주관하며 문형(文衡)이라고도 합니다. 봉교 이하는 한림(翰林)이라고도 칭하는데, 이들은 춘추관의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습니다. 이는 승정원의 주서(注書)와 같은 사관(史官)으로서 시정기(時政記)·사초(史草) 등을 기록하는 중요한 직책이었습니다.


    따라서, 봉교 이하를 처음 임명할 때에는 의정부에서 이조·홍문관·춘추관·예문관과 함께 ≪자치통감≫·≪좌전≫ 및 제사(諸史) 중에서 강(講)하게 하여 합격한 자에 한해 서용하도록 했으며, 그 후보자를 전임 한림이 추천하도록 했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대전통편≫에서는 영사(領事)를 영의정이 겸하도록 고쳤고, ≪대전회통≫에서는 직제학을 없앴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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