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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팥소보로크림빵
단팥소보로크림빵

사극에서 신하들이 몽진이라는 말을 하던데 어떤 뜻인가요?

현재 고려거란 전쟁에서 고려 조정에서 신하들이 몽진을 이야기하더군요. 그런데 몽진이라는 거는 어떤 뜻이고 왜 몽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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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Slow but steady
    Slow but steady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진이라고 하는 단어는 한자어 인데 몽진 (蒙塵)의 의미는 덮을 몽, 티끌 진이라는 한자를 써서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머지를 뒤집어 쓰며 급하게 궁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것을 말한다고 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진은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급박한 상황에서 평상시와 같이 길을 깨끗이 소제한 다음 거둥하지 못하고 먼지를 쓰며 피난함을 비유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진은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입니다.

    평상시 왕이 행차 할때는 길을 깨끗이 쓸어서 먼지가 없을 정도로 청소를 합니다. 그런데, 청소 할 겨를도 없이 왕이 움직여야 하는 급박한 상황이 닥친것이지요. 곧 왕이 피난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진은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의미로 임금이 난리를 만나 궁궐 밖으로 몸을 피한다는 의미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진은 임금이 난리를 만나 궁궐 밖으로 몸을 피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먼지를 뒤집어 쓴다는 뜻으로 임금이 급박한 상황에서 평시와 같이 길을 깨끗이 소제한 다음 거둥하지 못하고 먼지를 쓰며 피난함을 비유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몽진은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현종이 전라북도 완주군 지역을 거쳐 나주로 피난간 사건입니다.

    거란군은 1010년(현종 1) 11월 1일에 장군 소응(蕭凝)을 보내 고려를 공격하겠다는 사실을 알리고, 1010년 11월 16일에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공격하면서 2차 침입을 감행했다. 이 때문에 현종은 1010년 12월 28일에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길을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바탕으로 날자별로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011년(현종 2) 1월 1일에 거란군이 개경[현 개성시]에 들어왔으며, 현종은 광주(廣州)[현 경기도 광주시]에 묵었다. 1011년 1월 3일에 현종은 광주를 출발해 비뇌역(鼻腦驛)에 묵었다. 1011년 1월 5일에 양성현(陽城縣)[현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 일대]과 사산현(蛇山縣)[현 충청남도 천안시 직산면 일대]을 거쳐, 천안부[현 충청남도 천안시]에 이르렀다. 1011년 1월 7일에 공주[현 충청남도 공주시]를 거쳐, 저녁에 파산역(巴山驛)에서 쉬었다가, 여양현(礪陽縣)[현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일대]에서 머물렀다. 1011년 1월 8일에 삼례역을 거쳐 장곡역(長谷驛)[현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 앵곡]에 묵었다.
    1011년 1월 11일에 거란군이 개경에서 물러났다. 1011년 1월 12일 인의현(仁義縣)[현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백산리 일대]을 지나 수다역(水多驛)[현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에 묵었다. 1011년 1월 13일 노령(蘆嶺)을 넘어 나주[현 전라남도 나주시]에 들어갔다. 1011년 1월 16일 거란병이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1011년 1월 21일 현종이 가마를 돌려 복룡역(伏龍驛)[현 광주광역시 복룡역]에 묵었다. 1011년 1월 24일 고부군(古阜郡)[현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에 묵었다. 1011년 1월 25일 금구현(金溝縣)[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일대]에 묵었다. 1011년 1월 26일에 현종 일행은 전주[현 전라북도 전주시]에 도착해 7일 동안 머물렀다.
    1011년 1월 29일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돌아갔다. 1011년 2월 3일 전주를 출발해 여양현에 묵었다. 1011년 2월 4일 공주에 도착해 6일 동안 머물면서 김은부(金殷傅)의 큰 딸을 왕비로 맞이했다. 1011년 2월 13일에 청주[현 충청북도 청주시]에 머물렀다. 1011년 2월 16일에 청주를 출발해 1011년 2월 23일 개경(開京)으로 돌아와 수창궁(壽昌宮)에 들어갔다.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을 당하면서 현종이 나주로 몽진하게 되었다.

    1010년(현종 1) 12월 28일에 피난길에 오른 현종 일행은 1011년(현종 2) 1월 7일에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일대에 있었던 여양현에서 묵었다. 다음날인 1011년 1월 8일에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에 있던 삼례역을 거쳐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은교리에 있던 장곡역에서 묵었다. 현종 일행이 삼례역에 도착하자 전주절도사(全州節度使) 조용겸(趙容謙)이 평상복[野服]을 입고 어가(御駕)를 맞이했다. 이때 박섬(朴暹)이 “전주는 옛 백제 땅이므로 성조 역시 이곳을 싫어하셨습니다. 행차하지 마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자, 현종도 이를 받아들여 전주로 가지 않고 곧장 장곡역(長谷驛)으로 갔다고 되어 있다. 이날 밤에 현종이 장곡역에 머무르고 있을 때 조용겸은 전운사(轉運使) 이재(李載), 순검사(巡檢使) 최즙(崔檝), 전중소감(殿中少監) 유승건(柳僧虔)과 함께 장곡역으로 갔다. 이때 현종을 호위하던 지채문(智蔡文)이 유승건을 불러 안으로 들여 조영겸을 데려오도록 했으나 유승건은 도망쳤다. 다시 양협(良叶)에게 조용겸과 이재를 불러오게 하자 주변의 장수들이 조용겸 등을 죽이고자 했으나 지채문이 만류하고 제지했다. 그리고 조용겸과 이재 등을 시켜 대명궁주(大明宮主)의 말을 끌고 가게 했다가, 곧 전주로 돌려보냈다. 당시 거란군은 개경에 있었으며, 1011년 1월 11일에야 개경을 떠나 퇴각했다. 1011년 1월 13일에 나주에 도착한 현종 일행은 1011년 1월 16일에 거란병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1011년 1월 21일에 나주를 출발해서 1011년 1월 26일에 전주에 도착해 7일 동안 머물다가 1011년 1월 2월 23일에 개경에 도착했다.

    1011년 8월 2일에 조용겸(趙容謙)·유승건(柳僧虔)·이재(李載)·최즙(崔檝)·최성의(崔成義)·임탁(林卓) 등은 현종의 몽진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유배를 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