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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11.23

국채보상운동의 주요 목표는 무엇이었나요?

국채보상운동은 어떤 이유로 발생하였고, 어떤 요구 사항을 가지고 일본에 대항하였나요? 국채보상운동은 어떤 성과를 이뤄냈나요? 또, 국채보상운동이 독립 운동과 어떤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일제 강점 정책에 대항하는 다른 운동과 어떻게 연결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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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쉽게 말해 나라의 빚을 국민이 대신 갚는 것이 국채보상운동의 근본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대구에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100여 년 전 우리나라가 일본에 진 빚을 국민들이 대신 갚기 위해 벌인 범국민적인 모금 운동인 국채보상운동을 기리기 위해 조성한 공원입니다. 이 운동은 1907년 2월 대구에서 시작되었으며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약 1년여 동안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이 운동은 각계각층의 참여를 이끌어내어 큰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국채보상운동의 궁극적 목적이 한국의 국권회복에 있다고 간주한 일제의 집요한 방해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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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체 보상 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액수의 차관을 들여오도록 강요합니다. 1907년까지 들여온 차관만 해도 그 총액이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대한 제국으로서는 갚을 수 없는 금액이 되었던 것입니다. 일본은 차관을 빌미로 대한 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갔습니다.

    국채 보상 운동은 이와 같은 경제적 예속 정책에 저항하여 일어났습니다.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고 국권을 지키려는 국민적 운동입니다. 대국에서 시작한 이 운동은 적국적으로 확산됩니다. 국채 보상 기성회를 중심으로 각종 애국 계몽단체와 언론기관이 모금 운동에 참여했고, 전국의 모든 사람들이 여기에 뜨겁게 호응하고 나섰습니다. 모금을 하기 위해 금연 운동이 전개되었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까지 내놓았습니다. 국채 보상을 위한 국민 대회의 취지문을 보면 이와 같은 부녀자들의 뜨거운 호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운동을 통해 뜨거운 구국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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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러일전쟁 이후 동북아 균형이 완전히 무너지고 한반도의 세력 균형이 모두 일본으로 넘어오게 되며, 이후 일본 정부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에 나섭니다.

    일본은 러일전쟁이 진행중이던 1904년 8월 1차 한일협약을 통해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를 재정 고문으로 파견, 러일전쟁이 끝나는 1905년 9월 이후 일본은 대한제국의 화폐발행권을 박탈하고 전환국을 폐쇄, 이어 메가타는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는 등 조선의 경제권을 일본의 경제권 하에 예속시킵니다. 이어 1905년 11월 맺어진 2차 한일협약, 일명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일본 제국은 자칭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하여 라는 명목으로 강제적인 차관을 도입, 1907년 이 운동이 시작될 당시 그 액수가 1300만엔에 육박했습니다.

    당연히 대한제국은 이를 갚을 능력이 없었는데 당시 대한제국의 재정회계는 러일 전쟁 직전 대한제국의 1년 총 수입의 1/3 이하 수준이 된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07년 2월 21일 대한매일신보에 한 독자 투고가 실리는데

    지금 우리들은 정신을 가다듬고 충성과 의로움을 떨칠 때이니, 국채 1300만엔은 우리나라가 망하느냐 마느냐와 직결된 것입니다. 이것을 갚으면 나라가 유지되고 갚지 못하면 나라가 망함은 필연적인 사실이나 지금 국고에는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으며 만일 나라가 못 갚는다면 그때는 이미 3천리 강토는 내 나라와 내민족의 소유가 못 될 것입니다. 국토가 한번 없어진다면 다시는 찾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어찌 베트남등의 나라와 같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반 국민들은 국민으로서의 의무라는 점에서 보더라도 이 국채를 모르겠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모아서 이를 갚을 길이 있으니, 수고롭지도 않고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닙니다. 2천만 명의 국민들이 3개월동안 금연을 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0.2엔만큼 거둔다면 1300만엔을 모을수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자원해서 1엔, 10엔, 100엔, 1000엔을 특별히 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호소는 민중들의 애국심을 자극했고, 빠르게 전국으로 국채보상운동이 퍼지게 됩니다.

    이에 통감부는 친일단체 일진회를 동원해 누가 모금한 돈을 횡령한다더라 라는 소문을 퍼트렸고 당황한 국채보상기성회는 일진회에게 고소를 시전하나 일본은 기다렸다는 듯 국채보상운동의 핵심인물이었던 양기탁을 횡령 혐의로 구속, 국채보상운동에 큰 타격을 가합니다.

    이에 국채보상운동의 열기가 빠르게 식어버리면서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민족이 하나되는 경험을 통해 민족공동체 의식의 형성에 힘이 되었습니다. 비록 좌절로 끝나긴 했으나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의 하나로서 그 역사적 의의는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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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채 보상 운동이란 일본이 한 제국에 제공한 차관 1,300만엔을 국민들이 상환을 주도한 운동입니다. 1907년 2월 21일 경북 대구에서 서상돈, 김광제, 윤필오 등에 의해 처음 시작되어 대중들의 크나큰 호응을 바탕으로 전국으로 발빠르게 번져나갔습니다. 여러모로 약 90년 후(1997-1998년) 외환위기 당시 일어난 금모으기 운동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즉 누구의 지시를 받은 것도 아닌 국민들이 먼저 주도적으로 상환을 주도했다는 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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