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이후 만주에서의 독립 투쟁은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일제의 대만주 독립운동 탄압도 점차 강경해져 갔고 이 과정에서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제는 마침내 간도지역 불령선인 초토계획을 세워 간도지역에 대한 초토화작전을 계획하게됩니다. 따라서 일본은 19사단 병력과 시베리아 파견군 28여단, 그리고 관동군 부대를 동원하고, 산포, 비행기 등의 무장을 보강하며 훈춘-경원에 전산선을 설치하는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고 이후 일본군은 19사단 예하 병력을(73연대, 74연대, 27기병연대) 히가시 마사히코 소장 하에 병력을 동원하여 청산리의 독립군을 포위 섬멸하려고 하였습니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고 할수 있지요..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