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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
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10.31

정치적 사건인 경신환국은 어떠한 사건 이였나요?

조선시대 경신환국은 정치적 사건이라고 알고 있는데요.

경신환국은 어떠한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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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신환국은 1680년(숙종 6년)에 발생한 정치적 사건으로, 남인들이 권력을 잡고 있던 상황에서 서인들이 권력을 회복한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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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종때 2차 예송논쟁(1674)으로 남인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의 유일한 아들 숙종이 즉위하고 나고 남인의 전횡이 심해졌습니다. 그러자 당시 재상 허적이 조부 허잠의 시호를 받는 기념식 할 때, 궁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유악(천막)을 빌린 일을 구실(유악 사건이라 함)로 허적, 민희 오시수 등을 파직하였습니다. 더불어 서인 역모죄로 '삼복의 변'을 더해 1680년(숙종 6년) 3월부터 4월 사이 조선 조정에서 남인 일파가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허견, 허적, 윤휴 등) 시키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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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80년(숙종 6) 남인이 정치적으로 실각하고 서인이 권력을 잡은 사건을 일컫습니다. 1674년 남인은 2차 갑인예송 문제로 서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으나 경신환국으로 다시 실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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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신환국은 1680년 남인이 대거 실각해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입니다.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하며 이 사건으로 서인이 득세하게 됩니다.

    1647년 예송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했는데 이것은 남인끼리 청남, 탁남으로 갈려저 서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권력을 장악한 남인 세력에 대한 염증때문이었습니다.

    경신년인 1680년 3월 당시 남인의 영수이며 영의정인 허적의 집에 그의 조부 허잠을 위한 연시연이 있었고 이때 이번 연회에 병판 김석주,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 원근 김만기를 독주로 죽일 것, 허적의 서자 허견은 무사를 매복시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고 김석주는 핑계를 대고 불참하고 김만기만 참석합니다.

    그날 비가 오자 숙종은 궁중에서 쓰는 용봉차일을 보내려 하나 벌써 허적이 가져간 뒤였고 숙종은 노하여 허적의 집을 염탐하게 했는데 남인은 다 모이나 서인은 김만기, 신여철 등 몇 사람뿐이었고 이에 노한 숙종은 철원에 귀양갔던 김수항을 불러 영의정을 삼고, 조정의 요직을 모두 서인으로 바꾸는 한편 이조판서 이원정의 관작을 삭탈해 문 밖으로 내쫓으라 합니다.

    다음달인 4월 정원로는 허견의 역모를 고변, 이른바 삼복의 변으로 인조의 손자이며 숙종의 5촌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3형제가 허견과 결탁해 역모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허견이 복선군을 보고 주상께서 몸이 약하고 형제도 아들도 없는데 만일 불행한 일이 생기는 날에는 대감이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될 것이오, 이때 만일 서인들이 임성군을 추대한다면 대감을 위해 병력으로 뒷받침하겠소 하였으나 복선군은 아무 말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잡혀와 고문 끝에 처형되고 복창군, 복선군은 귀양갔다 다시 잡혀와 참형을 받게 됩니다. 허견의 아버지 허적은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여 죽음을 면하나, 뒤에 악자를 엄호하였다 하여 죽임을 당했고 이로써 남인은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들이 득세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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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신환국은 조선 숙종 6년인 1680년 경신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집권 세력인 남인이 축출되고 서인이 대신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당초 이 사건은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이 자신의 할아버지가 시호를 받아 기념잔치를 벌였는데, 마침 비가 내려 국왕의 허락 없이 유악(기름먹인 천막)을 가져다 쓴 데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유악사건은 실록에 나오지 않고, 조선시대 야사집인 «연려실기술»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실은 아닌 듯 보입니다.


    실상 경신환국은 숙종 초기 왕권의 불안정성과 남인의 지나친 독주에 따라 발생한 사건입니다.


    숙종 초반에는 현종 시기 제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숙종의 외가인 청풍 김씨 등도 만만치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숙종의 건강이 좋지 않자 유력한 종친들을 중심으로 불순한 움직임이 엿보였습니다. 또한 남인은 군권을 확실히 장악하고자 도체찰사부의 설치를 단행했습니다.


    이에 서인 측에서 김석주ᆞ김익훈과 같은 훈척 세력들이 남인 허적의 서자 허견이 역모를 일으키려 했다는 고변을 바탕으로 사건을 확대해, 숙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유력한 종친들을 제거하고 남인 대부분을 축출하였습니다. 이것이 경신대출척이라고도 하는 경신환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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