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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4

후삼국 통일전쟁의 원인, 과정등은 어떠한가요?

후삼국 통일전쟁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전쟁의 주요 원인, 과정, 결과 및 영향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이 기간 동안 활약한 인물들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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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리함
    누리함23.08.14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적 배경

    신라 말기에 등장한 후백제·후고구려(태봉·고려)와 신라를 우리 역사상 후삼국이라 하고, 견훤(甄萱)이 후백제를 건국한 892년(진성여왕 6)부터 고려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태종 19)까지의 45년간을 후삼국시대라고 한다.


    신라는 이른바 하대에 이르러 왕권이 쇠약해지고 정치가 문란해졌다. 이는 골품제적 신분 질서에 바탕을 둔 신라 사회체제의 구조적 모순과 그 운영 원리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었다.


    귀족들의 대토지 사유화로 인하여 토지로부터 유리된 농민들은 점차 중앙 지배층의 가혹한 경제적 착취에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서는 지방에서 중앙의 수취를 거부하고 나아가 정치적 지배에 저항하는 민란이 잇달아 일어나 중앙정부는 통제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온 일부 유학생이나 6두품 중 비판적이었던 일부 지식인, 또 당시 교종(敎宗) 중심의 불교계의 타락상과 교리를 비판하면서 성립된 선종(禪宗)의 교리를 공부한 선승과 이들이 개창한 9산선문(九山禪門) 중심의 선사들은 신라의 골품제사회를 비판하면서 지방에서 부상하는 새로운 지방 세력과 연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지방 세력은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내륙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해서 약탈로 무리를 구성해간 초적(草賊) 성격의 집단, ② 군진세력(軍鎭勢力)을 바탕으로 한 집단, ③ 해외무역 등으로 해상세력을 형성한 집단, ④ 촌주(村主)에서 성장하여 향촌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장악하여 지방에서 성주(城主)·장군(將軍) 등으로 불린 호족세력 등이다.


    먼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과거 고구려와 백제의 영역이었던 지역의 백성들이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신라는 진성여왕 이후 다섯 왕이 재위하는 동안 국토의 전체 영역을 다스리지 못하고 경주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 일원만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는 중국에서도 세계제국이었던 당나라가 907년에 망하고 오대(五代)가 교체되며, 북중국에서는 거란(契丹)이 등장하고, 남중국에서는 오월(吳越) 등이 등장하는, 이른바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였다. 중국이 혼란했던 이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우리 나라는 외세의 간섭을 비교적 적게 받을 수 있었고, 따라서 후삼국은 자주적으로 민족통일에 임할 수 있었다.


    후백제의 건국자 견훤은 상주(尙州) 또는 광주(光州) 출신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농민 출신으로 체구가 건장하며 뛰어난 무사적 재능을 타고났다고 한다. 서남해안지역 방수(防戍)의 책임을 맡으면서 군인으로 출세하였다.


    당시 서남해안지역은 옛 백제의 영역이었으므로 이 지역 백성들은 신라 중앙정부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견훤은 이를 이용해 신라에 멸망한 백제 의자왕의 원수를 갚겠다면서 자립을 선언하였다. 이에 대해 백성들이 크게 호응을 해오자 892년 무주(武州:지금의光州)에서 반기를 들고 왕이 되었다.


    900년(효공왕 4) 전주에 도읍하고 스스로 후백제왕이라 칭하며 관제를 정하였다. 후백제의 세력은 나주지역을 제외한 지금의 전라도 전부와 경상도 서부일대를 비롯하여 진주·합천까지 진출하고, 동으로 상주, 북으로는 청주·공주에까지 확대되었다.


    견훤은 신라의 군인으로 출세한 까닭에 신라 관제를 고수했으며, 적극적인 사회개혁 의지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때 군사적으로는 고려와 신라를 위협할 정도로 강성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오월이나 거란 등과 외교관계를 맺으며 국력을 과시하였다.


    927년(경애왕 4) 신라 경주를 습격하여 경애왕과 관료들을 죽이고 왕비와 궁녀들을 욕보이며 약탈을 자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오히려 고려와 신라의 관계를 밀접하게 만들어 경상도 일원의 세력이 왕건에게 귀부하는 결과를 빚었다. 안동지방의 고창(古昌)싸움에서 패배한 이후 군사적으로도 열세에 있다가 왕실의 내분으로 936년에 망하였다.


    궁예(弓裔)는 신라의 왕자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후궁 소생의 버림받은 왕자로서 성장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듯하다. 지금의강원도 영월지방에서 승려가 되었다가 죽주(竹州:지금의 죽산)에서 기훤(箕萱)에게 의탁하였다.


    곧이어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도적의 괴수 양길(梁吉)에게 인정받아 장수로서 군사를 이끌고 지금의영월·강릉·인제 등의강원도 일대를 점령하면서 많은 무리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러나 한산주(漢山州:지금의 廣州) 관내를 공략하고 나아가서 철원(鐵原,鐵圓)에 근거를 두면서 양길로부터 독립하였다.


    898년 송악(松嶽:지금의 개성)에 도읍하면서경기도·황해도를 점령하고 충청도 북부까지 진출하면서 왕을 칭하였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원수를 갚는다고 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다 하여 처음에는 국호를 후고구려라고 하였다. 이어 901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고치고,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한편 청주(淸州)사람 1,000호(戶)를 철원으로 옮겨 수도를 삼았다가, 다음 해 천도하고 연호도 성책(聖冊)으로 바꾸었다. 911년에 또다시 국호를 태봉(泰封),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로 삼았다가 914년에 정개(政開)로 고쳤다. 궁예는 왕건으로 하여금 나주지방을 경략하게 하여 후백제의 배후를 위협하고 중국과의 외교를 차단하려 하였다.

    또한 그의 영역은 북으로 평양에 이르고, 남으로는 지금의 강원도·경기도를 비롯하여 충청 북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고 미신적인 불교에 빠져 신하들을 의심하다가 인심을 잃어 918년 왕건에 의해 쫓겨나고 말았다.


    왕건은 조상 대대로 송악지방에 거주하면서 예성강 하구와 강화도 일대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세력을 형성하였다. 아버지 왕륭(王隆)은 송악 지방의 호족으로서 뒤에 궁예에게 귀속하였다. 이 때 왕건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장군으로서 크게 활약하였다.

    충주·청주 등지를 점령하기도 하고 나주지방을 경략하여 궁예의 세력기반을 튼튼히 하였으며 궁예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궁예가 점차 포악해지고 의심이 많아 신하들을 함부로 죽이는 상황에 이르자, 918년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즉위하였다.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하였다.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하며 정통성을 주장하려 한 것은 궁예와 마찬가지였다. 건국 이듬 해 수도를 송악으로 옮겼다. 송악은 교통이 편리하고 왕건의 오랜 지지기반이었던 곳이다. 송악은 그 뒤 개경(開京)으로 바뀌어 고려 500년의 수도가 되었다.

    7세기 중엽에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병합하여 이룩한 삼국통일이 종래 고구려의 영토 거의 전부를 상실하고 그 일부만을 가지게 된 불완전한 민족통일이라 한다면, 고려의 후삼국통일은 신라와 후백제의 영토와 문화 전부를 통합한 진정한 민족통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신라의 통일은 당나라라는 외세를 이용한 것에 비하여 고려의 통일은 우리 민족의 자력에 의한 것이기에 더욱 의의가 있다.


    또, 후삼국통일 이후 신라시대에는 영토의 한쪽에 치우쳐 있던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한반도의 중부지방인 개성으로 옮겨짐으로써 고구려·백제·신라의 옛 영토를 지배하기가 용이해져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한 큰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발해의 유민까지도 받아들임으로써 민족통일을 이루었다고 하겠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통일신라 말기 견훤이 후백제, 궁예가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이후 축출되고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습니다. 쇠퇴될대로 쇠퇴된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게됩니다. 견훤의 아들 신검이 반란으로 내분이 일어나고 신검은 견훤을 금산사에 감금합니다. 견훤은 탈출하여 고려로 망명하죠. 이후 왕건과 견훤이 후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켜 후삼국 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