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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6.14

청나라는 조선을 왜 침범한건가요?

명나라때는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였던것으로 기억하는데 청나라때는 우리나라를 침범한 횟수도 많고 고통을 많이 받았는데요. 왜 청나라와 조선의 사이가 안좋았던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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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나라와 조선은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전쟁들은 지역적인 영토 경쟁, 정치적 갈등, 경제적 이해 등 다양한 이유로 발발하였습니다. 아래에서는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일부 주요 전쟁을 간략히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병자호란 (청조 전쟁, 1592-1598):

    전개: 일본의 토요타쿠 혼나비(豊臣秀吉)의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내용: 조선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아 일본과 싸웠으며, 청나라는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했습니다.

    결과: 조선과 청나라의 협력으로 일본을 격퇴하고 전쟁을 승리로 마쳤으나, 많은 인명 피해와 피해를 입었습니다.

    청나라의 후금 침입 (1627):

    전개: 청나라인 후금(後金)이 조선을 침공하여 국왕인 인조를 납치하는 사건입니다.

    내용: 후금은 조선에 침입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납치한 후 조건을 제시하였습니다.

    결과: 조선은 후금의 요구에 응해 보복을 피하고 국왕을 회복시켰지만, 국가적인 수준에서는 외국의 압박을 경험하였습니다.

    청나라의 임진왜란 (청룡사변, 1636-1637):

    전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전쟁을 일으킨 사건입니다.

    내용: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결과: 조선은 일부 영토를 양보하고 청나라의 통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영향력 하에서 일본과의 경제적 교류를 통해 어느 정도의 안정을 유지하였습니다.

    이외에도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는 다른 전쟁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주로 영토 경쟁과 정치적 갈등 등을 배경으로 발발했습니다. 다음은 일부 추가적인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전쟁입니다.

    정묘호란 (1654-1655):

    전개: 청나라의 요인인 후진과 조선의 요인인 정묘간의 경계 분쟁으로 발생한 전쟁입니다.

    내용: 정묘는 후진에 의해 점령되어 조선이 후진을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후진을 지원하기 위해 정묘에 대항하였습니다.

    결과: 조선은 정묘를 다시 점령하고 청나라와 정묘간의 경계를 안정시켰습니다.

    양반전란 (1674-1675):

    전개: 청나라와 조선의 양반 간의 정치적 갈등으로 발생한 전쟁입니다.

    내용: 청나라의 지원을 받은 양반은 조선의 정권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청나라는 반란을 지원하였습니다.

    결과: 조선은 양반의 반란을 억누르고 청나라의 간섭을 거부하였으며, 조선의 독자성을 유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전쟁들은 청나라와 조선 사이의 관계를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각각의 전쟁 상황과 배경에 따라 다양한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는 두 나라 간의 교류와 갈등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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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4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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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 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1637년 2월까지 약 3개월에 걸쳐 청나라가 조선을 공격 한 전쟁 입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 하기 전에 그 배후의 안전을 확보 하기 위해서 조선을 먼저 공격 한 것 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조선은 너무나 많은 피해를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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