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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
힘찬하늘소17723.08.15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표트르 1세는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이면서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라고 하는데요.


러시아의 표트르 1세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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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루스 차르국 로마노프 왕조의 4대 차르이자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임페라토르)로 표트르 대제(표트르 벨리키 Пётр Великий)라고 불립니다. 영미권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피터 1세'라고도 부릅니다

    몽골-타타르의 멍에 때문에 서유럽과의 교류 단절 및 중세 수준 문화에 머물던 러시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급진적인 서구화를 밀어붙인 지도자입니다. 지나친 서구화의 반발로 여러 번의 정변이 있었으나, 모두 피의 숙청으로 마무리했고,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에서 대승해서 변방의 국가였던 러시아가 이후 서유럽에 주요 정치세력으로 당당히 등장할 수 있게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여러모로 훗날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비견되는 인물. 스탈린이 존경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는 스탈린 시절에 표트르 대제가 높이 평가된 사실을 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참고로 키가 엄청나게 컸는데 지금 기준으로도 장신이다 못해 거인인 203cm였습니다. 오늘날로 따지면 농구선수나 배구선수에게서나 나올법한 체격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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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알렉세이의 14째 아들로 알렉세이 황제의 후처 나타리아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10세때 궁중혁명으로 크렘린에서 쫓겨나 모스크바 근교 프레오브라젠스코에 마을로 이사, 정규교육은 거의 받지 못하고 자랐으나 어린시절부터 총명하고 건강해 초인적이라고 할 만큼 정력적인 방법으로 러시아에 주류하던 외국인들로부터 포술, 조선술 등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배웠습니다.

    1682년 이복형 이반 5세, 이어 이복 누나 소피아와 병립해 정무를 보다, 소피아가 그에 대한 음모를 꾸미다 실패하자 1689년 정치의 실권이 그에게로 돌아갔으며 1695년 돈강의 하구에 있는 튀르키예의 요새 아조프를 공격하다 실패하자 많은 외국인 기사들을 초빙하는 한편 전국의 장인들을 소집하여 함대를 편성, 이듬해 다시 튀르키예를 공격해 아조프를 차지합니다.

    1679년 튀르키예에 대한 서유럽 기독교국들의 동맹 체결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워 서유럽에 사절단을 파견하면서 자기 자신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변장하여 러시아의 군주로서는 최초로 서유럽 각국을 여행해 견문을 넓히고 스스로 직공이 되어 포술, 조선술을 익혔으며 그의 서유럽 여행은 본국의 총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음으로 중단되나 귀국 후 즉시 반란 진압과 동시에 러시아인의 복장을 비롯해 수염을 기르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습, 풍속에 일대 개혁을 단행합니다.

    1700년 스웨덴과 북방전쟁이 벌어져 21년이나 싸움이 계속되었으나 니스타트의 화의로써 잉그리아,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등을 손에 넣어 러시아가 목적한 바를 거의 달성, 1721년 원로원은 그에게 임페라톨이라는 칭호를 보내고 대제라 부르게 되었는데 이로써 러시아의 절대주의 왕정이 확립되었습니다.

    1703년부터 네바 하구의 삼각주에 새로운 수도 상트페체르부르크를 건설, 이곳을 유럽에 대한 창구로 사용함과 동시에 발트해 지배를 위한 기지로 삼았고 부국강병책으로서 군사, 행정, 산업, 교육, 종교 등 각 분야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나 그 대부분이 즉흥적인 착상에서 나온 것이고 중심 사상이 결여된 것으로 오래 계속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세운 14의 관등표는 경찰제도와 함께 제정이 몰락할때까지 존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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