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김주열 열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4.19혁명의 불씨가 되었던 김주열 열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학생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어디서 어떻게 활동을 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27일동안 행방불명이었던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서 발견되었으며 사망했습니다.
김주열 열사는 전라북도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 넷째로 태어나 1956년 금지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3년 뒤 1960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여 마산용마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같은 해 3월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실종 27일만인 4월 11일 창원시 마산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은 운전기사를 시켜 시신을 바다에 유기한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해안가에서 한 달 후에 발견된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유족들도 물론 시민들도 분노하였습니다
그의 죽음과 시신 발견 소식은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로 세상에 알려지고 전국으로 번져 4·19 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주열 열사는 대한민국의 학생민주화운동가입니다.
전라북도 남원군 금지면 옹정리에서 아버지 김재계와 어머니 권찬주 사이의 3남 2녀 중 차남(넷째)으로 1944년 10월 7일에 태어났다. 할아버지 김태종은 해방 직후 면장을 지냈으며 아버지는 조합장을 지낸 천석꾼 부잣집이었다.
김주열이 어린 나이에 죽었으면서도 비교적 많은 사진이 남아 있는 것은 그 시절에 이미 사진기와 전축을 가진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기 때문이다. 어머니 권씨는 경상남도 함양군 사람으로 ‘함양댁’이라 불렸으며 이는 김주열의 PK 지방과의 인연을 암시하고 있다. 1956년 용지국민학교(현 금지동초등학교), 1959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했고 이어 진주고등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으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 남원농업고등학교(현 남원용성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적성에 맞지 않았는지 몇 달을 다니지 않고 집에서 재수를 시작했다.
1년 후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져 가세가 서서히 기울자 김주열은 서울로 올라가 학비가 별로 들지 않는 철도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지만 실패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원서를 냈다. 그러나 형 김광렬의 친구이며 형같이 따르던 하용웅의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면 은행원을 하는 것이 지름길이다."라는 권유를 받고 마산상업고등학교에 다시 원서를 내게 된다.
마산상업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고 돌아와 1960년 3월 14일로 예정된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으로 갔지만, 3.15 부정선거를 앞두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극도로 꺼린 교육청에서 합격자 발표의 연기를 종용해서 3월 16일로 연기되어 있었다. 그래도 하용웅 선배의 담임 선생님을 통해 합격했음을 확인하였지만 당시에는 마산에서 남원까지 꼬박 하루가 걸려서[8] 첫 차를 타지 못하면 도중에서 유숙해야 했기 때문에 곧장 남원으로 귀향하지 못했다.
당시 김주열의 이모할머니는 열렬한 민주당 당원이었는데, 자유당의 부정선거로 인해 투표 통지표가 전달되지 않아 종일 울분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산에서의 부정선거가 들통이 났고,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자 이를 목격한 이모할머니가 집으로 와서 두 형제에게 시내에 나가보라고 한다. 이에 형제는 시위에 합류하게 되었지만 김주열은 돌아오지 않았다.출처: 나무위키 김주열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60년 마산상고에 지원했다가 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형 김광렬과 함께 마산에 갔으며 발표일이 연기되어 마산에 잔류하였고,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실종되었습니다.
실종 27일째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유기되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었고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6년 금지동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한 뒤 마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같은 해 3월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에 참가했다가 행방불명된 뒤 실종 27일만인 4월 11일 창원시 마산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알루미늄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과 시신 발견 소식은 4월 11일 부산일보 허종 기자의 기사[2]로 세상에 알려지고 전국으로 번져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