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산력이 증가하는 반면 노동력의 중요성은 그와 반비례해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생산량이 낮던 시대에는 경제활동에 노동력이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과년한 딸과 그 딸이 낳을 자식들의 노동력을 사위 집안에서 가져가는 것은 치명적이었으므로 남성이 결혼 후 한동안 처가에 살면서 노동을 하여 딸이 시가로 가면 여성의 집안에서 잃게 될 노동력을 미리 보상한것입니다.
데릴사위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려시대까지 사위양자(서양자, 壻養子)라는 게 있었다. 집안에 딸만 있는 경우 가계 계승을 위해 사위를 맞으면서 양자 노릇을 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계혈연의 가계 계승만 인정해 ‘사위는 사위일 뿐’이 됐다. 같은 성씨의 혈족에서 양자를 입적해 가계를 계승하는 한편, 사위는 가사를 돌보게 했다. 이게 솔서(率壻)혼이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가난한 농민이나 화전민 중에는 비록 아들이 있어도 사위를 맞아 동거하면서, 생활비를 대는 대신에, 무상의 노동력을 제공 받고 그 뒤 간단한 세간을 마련해 주어 분가 시키거나, 혹은 분가시키지 않고 그대로 계속 같이 살게 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데릴사위의 위치는, 처가와 경제적인 의존 관계에 있었으므로 떳떳 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