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주교 박해사건중 병인박해의 전개에대해서 설명해주세요?
조선의 천주교 4대 박해가 있다고 하는데요
그중 병인박해의 사건 전개와 이유,그리고 결과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대원군은 원래 천주교에 대해 묵시적으로 이해를 지녔던 인물이나 그가 천주교 박해령을 선포하고 장기간에 걸쳐 박해를 강행한 것은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에 따른 국가적 위기 의식과 정치 반대세력의 비난에서 벗어나 정권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습니다.
1858년 5월 애로우호사건에 따라 톈진조약이 맺어지고 러시아가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게 되며 그 뒤 러시아는 자주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 대원군을 비롯한 정부고관들은 이에 위기의식을 느끼게 됩니다.
이때 김면호, 홍봉주 등의 천주교도들이 이이제이의 방아책을 건의 , 대원군의 정치적 관심을 끌게 됩니다.
승지 벼슬을 지낸 남종삼은 대원군에게 한불조약을 체결해 나폴레옹 3세의 위력을 이용하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을수 있다 주장, 이를 보다 구체화시키기 위해 조선에 체류하고 있는 주교 베르뇌를 만날것을 건의합니다.
대원군은 만약 러시아를 물리칠수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암시를 주어 천주교도들은 매우 기뻐했으나 지방에 있던 베르뇌와 주교 다블뤼가 서울에 도착한 것은 한 달이 지나서였고 대원군의 처지는 급격하게 바뀌어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1866년 1월 도착된 북경사신의 편지에서 영불연합군의 북경함락 이후 시작되었던 양인살육의 사실이 보고되었다는 점, 청나라의 천주교 탄압의 소식은 반 대원군 세력으로 하여금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정치적인 공세를 취하게 했고, 이에 대원군은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껴 쇄국양이와 사교금압의 정책으로 전환합니다.
운현궁에 천주교가 침투했다는 소문이 퍼져 조대비까지 천주교를 비난하자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을 결심, 박해령을 선포합니다.
1866년 2월 베르뇌를 선두로 홍봉주, 남종삼, 김면호는 물론 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 대표적 교인들과 다른 수천명의 교인들이 서울 및 그 밖의 지역에서 잡혀 순교, 이때 베르뇌, 다블뤼 등 9명의 프랑스 신부도 체포되어 서울 새남처 , 충청남도 보령의 갈매못에서 순교합니다.
박해가 치열해지자 피신해있던 신부 리델은 7월 초 조선을 탈출, 청나라의 톈진으로 가서 프랑스 동양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구원을 요청, 이에 로즈는 10월 7척의 군함을 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 책임을 묻는 무력시위를 벌이게 되며 병인양요가 발생
이 병인양요로 박해는 제 2단계에 들어가는데 대원군은 국가적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며 천주교도를 통외초구의 무리로 내세워 수많은 천주교인을 처형, 이때 대원군은 양이의 발자국으로 더렵혀진 땅은 그들과 통하는 무리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처형지는 주로 서울과 해안지방으로 정해지게 됩니다.
이러한 박해는 1868년 4월 일어난 오페르트의 남연군묘 도굴사건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어 내포지방 중심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났고, 오페르트는 수차에 걸친 통상요구가 거듭 거부되자 대원군 아버지의 분묘를 도굴할 계획을 세우고 작업을 피나 미수에 그칩니다.
이에 대원군은 크게 분노해 내포 지방의 교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 내포지방은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천주교가 유포된 지역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었고, 부근의 지방까지 피해를 입게 됩니다. 그 뒤 1871년 신미양요로 다시 박해가 가중됩니다.
신미양요는 1866년 평양시민의 공격으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의 사건을 미국이 정치적으로 이용, 조선에 포함외교를 펴고자 하며 시작되었고 미국 함대의 강화도 공격을 시발로 하여 6일간의 전투 끝에 결국 미국은 물러가게 되며 격퇴에 성공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국민에게 철저한 쇄국양이의 국시를 선명하는 한편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해 처형, 그 뒤에도 탄압이 계속되다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하자 병인박해가 마무리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