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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6.18

조선에서 카톨릭을 금지한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조선에서는 천주교의 책을 금서로 정하고 천주교를 믿지 못하게 했는데요.

조선의 어떤 점과 맞지 않아서 카톨릭을 금지했었던 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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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불교뿐 아니라 도교, 무교 등도 당시 교세가 불교만큼 크지 않아 덜 부각될 뿐 조선왕조에서는 모두 억압의 대상이었습니다.

    뒤늦게 들어온 천주교도 그런 맥락에서 일정 이상 퍼지지 못하도록 박해를 가한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천주교 박해는 꾸준히 있었는데,

    대규모 박해는 총 4번 있었으며 이 4번의 박해로 많은 천주교인이 학살당하며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렇게 100여년 가까이 이어져온 조선의 천주교 박해는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천주교 포교가 허용되면서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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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신분제 사회였고, 왕이 유일한 지존이없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의 교리는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하나님이 유일신입니다.

    그래서 조선의 기본 이념과 완전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탄압당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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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출발하여 1886년 한불수호조약(韓佛守護條約)으로 선교의 자유를 획득하기까지 100여 년 동안은 한국교회의 혹독한 박해기요, 더불어 가장 탄탄한 주춧돌을 마련하기 위한 시련기였다. 만민평등사상과 천주사상을 외쳤던 종교적 요인도 있지만, 타락한 세도정치의 희생물이 된 천주교는 조선왕조 말기의 숱한 권력의 변화와 더불어 수많은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최초의 박해는 을사년(1785) 봄, 명례방(현재의 서울 명동)에서 종교집회를 열고 있던 초기 교회의 지도자들이 추조(형조)의 관헌에게 적발됨으로써 일어났다(을사추조적발사건). 이중 집주인인 김범우는 자신의 믿음을 굽히지 않아 한국교회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고 신주를 불살랐던 윤지충과 권상연이 순교하였다(신해박해). 이 박해 이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고, 신도들의 열렬한 전교활동으로 교세가 크게 발전하자 이에 두려움을 느낀 정부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단행함으로써 1795년에는 윤유일 등이 순교하였다(을묘박해).



    이후 1801년의 신유박해는 신생교회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는데 주문모 신부와 '백서'사건의 황사영 등 200여 명의 신도가 순교했다. 그러나 그런 박해 속에서도 살아 남은 신도들은 다시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 결과 1831년에는 조선교구가 설정되었고, 이에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사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1839년의 기해박해 때는 3명의 프랑스인 선교사와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지은 정하상 등이 순교하였고, 1846년의 병오박해 때는 최초의 한국인 신부 김대건과 현석문 등 9명의 교우가 순교하였다. 한편, 교구 설정을 전후하여 한국인 성직자를 양성하고자 노력했는데, 박해시대 동안 김대건과 최양업이 신부로 서품되었다. 김대건 신부는 뜨거운 신앙과 뛰어난 학식으로 신도들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며 장렬히 순교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신도들을 위한 봉사와 성직자 양성을 위해 전생애를 바쳤다. 비록 피를 흘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활은 연속되는 순교 그 자체였다. 마지막으로 1866년에 시작된 병인대박해는 근 10년간 계속된 가장 혹독한 시련으로 선교사 9명이 희생되고 남종삼 등 8,000여 명의 신도들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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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은 성리학의 나라이고 신분제 국가였습니다. 양반이 지배층으로 양반의 지배를 위협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천주교를 보았습니다. 신 앞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사상은 조선의 피지배층이 수용하게 되면 나라 운영과 양반지배가 무너질 수 있다고 본 것이죠. 성리학은 조상공경과 충, 효가 핵심인데 제사를 부정하는 등의 천주교는 공존할 수 없는 배격해야만 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병인박해 등 몇차례 천주교신자를 처형하는 등 철저히 부정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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