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반청주의자였으며, 청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소현세자가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려워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해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는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가서 죽는 등 소현세자 가족이 모두 제거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조의 행동은 소현세자를 독살했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인조는 정묘호란 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40여일간 항쟁하였으나 식량도 떨어지고 더이상 한계를 참지 못하고 항복하게 됩니다. 인조는 청 황제인 숭덕제 앞에서 삼두고구례를 당하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삼전도 굴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 부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이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가게 됩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저항하고 항거하는 선봉장이 되주기를 바랐으나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가서보니 생각보다 너무 큰나라였고 때마침 거기에서 만난 프랑스 신부를 통해 또다른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직 힘을 키운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이런 행동이 인조에게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붙어서 인조 자신을 내칠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소현세자를 불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볼모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게되는데 이는 인조가 독약을 먹여 죽였다고 합니다. 세자빈 또한 폐출되어 사사당했으며 세아들들도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