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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우람한스컹크18323.07.24

고구려의 연개소문의 권력은 어느수준이었나요?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왕과 신하들이 자신을 제거하려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과 반대파를 숙청하고 보장왕을 세우는데 정변전과 정변후 연개소문의 고구려내 지위와 권력의 변화는 어느정도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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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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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2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사람으로 고구려 말기를 대표하는 권신입니다.

    권신(權臣)이란 전근대에 왕조에서 신하로서 권력를 휘두르던 권력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실세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는 동부대인 연태조이며 뒤를 이어 동부대인의 지위를 계승받았습니다.
    이후에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과 반대파 귀족들을 모조리 살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했으며 대막리지라는 관직에 올라 집권했다고 합니다.

    그는 7세기 고구려의 한계 상황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명장, 혁명가, 정치가로 만족해야 했다고 합니다.

    연개소문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권신의 입장에서 권력을 장악하며 국가를 통솔한 것은 이점보다는 폐해가 많았습니다.

    그의 라이벌로 지칭되는 이세민과 김춘추는 모두 일국의 왕이었습니다.

    따라서 정적 제거나 권력 강화에서 연개소문은 이들보다 명분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권력 강화는 무리한 독재권력, 세습정권의 폐해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비정상적인 권력구조는 고구려 정치권의 비효율성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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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정변을 일으킨 후 고구려의 실권을 장악하고, 왕까지 시해할 정도였으니 소위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인물이 665년 사망하자 고구려라는 국가도 3년 만에 무너진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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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정변 이후 연개소문은 당시 고구려에서 왕에 이은 2인자이자 총리직에 해당하는 막리지(莫離支)보다 더 강한 실권을 가진 왕과 대등한 대막리지(大莫離支) 관등을 신설하고 본인이 직접 그 자리에 올랐다. 대막리지(大莫離支)는 왕의 총무를 모두 독점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왕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는 얼굴마담에 해당하였다.


    연개소문은 대신을 100여명 이상 죽이는 학살에 가까운 정변을 통해 주화파가 득세하던 고구려 중앙 정계의 판 자체를 뒤바꿔놓았다. 642년을 기점으로 고구려의 모든 권한은 연개소문이 독점하게 되었으며 그의 식솔들과 그를 따르는 주전파들이 평양성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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