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이라는 곳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조선 중기시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것이 서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원의 교장을 훈장이라고하고, 학생회장을 장의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서원은 오늘날의 지방 사립 대학교로 볼수 있습니다.
* 서원은 지방교육기관 즉, 오늘 날로 보자면 '초등~중학교'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보시면 되며, 물론 이 때는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닌 유교 경전(논어, 맹자 등)을 강론하고 이에 대해 가르치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추후 사림의 지방 기반이 되기도 하는 기관이죠.)
조선 시대 16세기 사림이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세운 건물. 제사와 인재 양성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최초의 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에 안향을 모신 백운동 서원이다. 이 서원은 이황의 건의로 왕으로부터 소수 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사액 서원은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와 서적에 대한 지원이 보장되었다. 대표적인 사액 서원으로는 경상북도 안동의 이황을 모신 도산 서원이 있다. 초기의 서원은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증설됨에 따라 양반층의 이익 집단화 경향을 띠었다. 사액 서원의 경우 면세의 특권으로 양반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시키는 반면 국고의 감퇴를 가져왔고, 군역 기피로 군정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유생들은 서원의 붕당에 가담하여 관학인 향교를 외면하였다. 이와 같이 서원은 향약, 유향소와 더불어 사림의 세력 기반과 붕당의 온상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서원의 폐단에 대한 시정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특권 계층의 이해 관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1864년 서원의 폐단을 절감한 흥선 대원군은 서원의 특권을 폐지하였으며 전국 47개소만 남기고 모든 서원을 철폐하였다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촌 사람들이 모이는 일종의 공공장소였다고 합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역 안팎의 여러 소식이 모여드는 곳이었지요. 향촌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서원에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모여 논의를 거친 후 결정하곤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