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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부적오함마
신대부적오함마23.02.06

서원은 무엇을 하던 장소였나요?

어느 지역을 가던 무슨무슨서원이라고 갈색이정표로 되어있는곳이 있던데요. 이런 서원들은 과거시대에 무엇을하던곳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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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7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원이라는 곳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 기관이었습니다. 조선 중기시대 사화를 비롯한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학자들은 지방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했던것이 서원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러한 서원의 교장을 훈장이라고하고, 학생회장을 장의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서원은 오늘날의 지방 사립 대학교로 볼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남지혜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서원은 본래 기능이 제례와 교육입니다. 그밖에 지역의 유림들이 모여서 향촌과 나라일을 논의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곳이며, 도서를 간행하고 보관하기도 하였습니다.

    서원은 정기적인 제례와 부정기적인 제례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유교 교육ㅇㄹ 통해서 향촌의 풍속과 질서를 바로잡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서원(書院)은 조선 중기 이후 설립된

    사설 교육 기관이며, 유교의 성현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그러나 이때의

    서원은 재와 사의 두 기능을 겸한 것이 못 되었으니 1542년(중종 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순흥에서 고려의

    학자 안향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이듬해 백운동서원이라 한 것이

    조선 최초의 서원이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서원은 지방교육기관 즉, 오늘 날로 보자면 '초등~중학교'의 역할을 담당했던 곳으로 보시면 되며, 물론 이 때는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닌 유교 경전(논어, 맹자 등)을 강론하고 이에 대해 가르치는 곳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추후 사림의 지방 기반이 되기도 하는 기관이죠.)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전국 곳곳에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입니다.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 건물은 사우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로 나뉘며 오늘날의 지방사립대학교 라고 볼수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 16세기 사림이 선현들의 제사를 지내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세운 건물. 제사와 인재 양성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최초의 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에 안향을 모신 백운동 서원이다. 이 서원은 이황의 건의로 왕으로부터 소수 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고 사액(賜額) 서원이 되었다. 사액 서원은 국가로부터 토지와 노비와 서적에 대한 지원이 보장되었다. 대표적인 사액 서원으로는 경상북도 안동의 이황을 모신 도산 서원이 있다. 초기의 서원은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하고,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다. 하지만 증설됨에 따라 양반층의 이익 집단화 경향을 띠었다. 사액 서원의 경우 면세의 특권으로 양반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시키는 반면 국고의 감퇴를 가져왔고, 군역 기피로 군정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유생들은 서원의 붕당에 가담하여 관학인 향교를 외면하였다. 이와 같이 서원은 향약, 유향소와 더불어 사림의 세력 기반과 붕당의 온상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서원의 폐단에 대한 시정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특권 계층의 이해 관계로 효과를 거두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1864년 서원의 폐단을 절감한 흥선 대원군은 서원의 특권을 폐지하였으며 전국 47개소만 남기고 모든 서원을 철폐하였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향촌 사람들이 모이는 일종의 공공장소였다고 합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지역 안팎의 여러 소식이 모여드는 곳이었지요. 향촌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서원에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들이 모여 논의를 거친 후 결정하곤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