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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7.17

조선시대 보부상들은 어떠한 상인들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조선시대에 수많은 보부상들이 나오는데요 보부상들은 어떠한 상인인지 그들의 성격과 기능을 알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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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의 보부상은 보통 지방의 장시를 돌아다니는 행상을 가리켰습니다.

    보부상은 국가의 일정한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에 국가에 동원되어 정치적인 활동을 수행해 온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임진왜란 때의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수천 명의 부상들이 동원되어 식량과 무기를 운반·보급하고, 직접 전투에도 가담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달리 도시의 큰 시장에서 활동하는 상인은 난전,

    즉 자유 상인으로 사상이라 불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조선시대의 보부상들은 상인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로, 주로 상품을 사고 판매하여 이익을 얻는 일을 했습니다. 보부상들은 조선시대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보부상들은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며, 주로 섬유제품, 양념, 곡물, 목재 등 다양한 생활용품과 식품 등을 판매했습니다. 그들은 도시와 시골 지역을 오가며 상품을 수송하고 거래를 진행했습니다. 또한 보부상들은 도시 내에서 창고를 운영하거나 상점을 개설하여 상품을 전시하고 판매하는 일을 했습니다.

    보부상들은 경제적으로 중상층에 속하며, 그들의 상거래로 인해 조선시대의 상업 활동과 교류가 활발해졌습니다. 그들은 물질적인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지며, 도시의 경제 발전과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 지역사회에도 기여했습니다.

    보부상들은 대체로 신뢰할 만한 상인으로 인정받았으며, 거래에 있어서는 계약과 상호 협상을 따르는 등의 원칙을 준수했습니다. 그러나 보부상들 사이에서도 경쟁과 갈등이 있을 수 있었으며, 일부는 부정한 상거래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보부상들은 조선시대 사회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들의 활동은 상업 문화와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 되셨길 바랍니당 ^^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을 하던 사람들이며 정밀한 세공품이나 사치품 등의 잡화를 취급한 보상과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 제품을 주로 판매한 부상을 합쳐 보부상이라 했습니다.

    지금은 도소매 유통체계가 만들어져 생산자에서 소비자까지 체계적으로 움직이지만 과거에는 보부상이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전국의 시장망을 따라 돌며 각지에서 생산된 생산물을 전국으로 유통시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보부상은 부보상(負褓商)이라고도 하는데, 대개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를 범위로 형성되어 있는 시장을 돌면서 각 지방의 물품 교환을 촉진하였다. 보부상은 시장을 돌아다니는 일반 장돌뱅이 가운데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군현이나 비변사(備邊司) 등에 공인받고 독점권을 행사하던 사람들이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근대사회에서 시장을 중심으로 행상을 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 교환경제를 매개했던 전문상인. 봇짐장수인 보상과 등짐장수인 부상을 통틀어 일컫는 말.


    본래는 별개의 조직체였는데, 1883년(고종 20)에 설치된 혜상공국(惠商公局) 아래 합쳐지면서 「보부상」으로 통틀어 일컫게 되었다. 보상은 주로 정교한 세공품이나 값비싼 사치품을 취급한 반면, 부상은 조잡한 일용품 등 가내수공업품을 취급했다. 보상은 보자기에 싸서 들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팔았고, 부상은 지게에 얹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대개 1일 왕복의 노정을 표준삼아 형성된 시장망을 돌면서 각 지방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보부상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으나, 부상단(負商團)이 조직된 것은 조선 초로서, 이에 관해서는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에 공헌했기 때문에 그 조직을 허용했다는 설과, 이와는 달리 상류계층과 무뢰한의 탐욕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했다는 설이 있다. 보상단(補商團)에 관해서는 79년(고종 19)에 발표된 「한성부완문(漢城府完文)」에 의해 알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그 이전부터 지역마다 각기 정해진 규율과 두령인 접장(接長)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보부상은 국가의 일정한 보호를 받는 대신, 유사시에 동원되어 정치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 전투에서는 수천 명의 부상이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을 뿐 아니라 전투에도 직접 참여하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공헌했으며, 병자호란 때는 인조(仁祖)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자 부상들이 식량을 운반해주었다. 전쟁이 끝난 후 정부에서는 이들의 요구대로 생선·소금·목기·토기·수철기(水鐵器)에 대한 전매권을 허락했다.

    66년 병인양요 때는 전국의 보부상이 동원되어 프랑스군을 무찔렀으며, 82년에는 민영익(閔泳翊)이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불만을 품고 경기도와 강원도의 보부상을 이끌고 서울로 침입한다는 소문이 있어 도성 내에 큰 혼란이 일기도 했다. 또 94년 갑오농민전쟁 때 보부상은 정부군에 합세하여 농민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당시 주축이 되었던 것은 충청우도(忠淸右道) 저산팔구(苧産八區)(모시를 생산하는 8읍 : 부여·정산(定山)·홍산(鴻山)·임천·한산·비인·남포·서천)의 보부상들이었다. 그 후 황국협회에 속하기도 했다가 여러 변천과정을 겪은 끝에, 일제강점과 더불어 일제의 보부상 말살정책에 의해 거의 소멸되었다.

    출처 : 한국고중세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