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는 어떤 변화를 겪었나요?
여진족의 침입으로 인해 고려가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국토의 손실, 외교적인 압박 등 여진족의 침입이 고려에 미친 영향과 그 결과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진족의 침입 이후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얻어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 부근까지 넓어졌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진족은 금나라를 만들고 강성해졌습니다. 이때 고려의 지배층은 문벌귀족으로 거란족이 쳐들어왔을 때 군사적으로 맞섰던 호족의 패기가 사라지고 보수화되었습니다. 금이 사대를 요구하였고 이 당시 권력자인 이자겸은 금의 사대요구를 수용해 굴복하였습니다. 따라서 고려 때 여진의 직접적인 침입은 없었으나 외교의 자주성이 훼손되었습니다. 이에 묘청, 정지상 등이 금과의 사대를 끊고 칭제건원을 요구하고 서경천도를 주장하는 묘청의 난이 일어났지만 김부식 등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는 건국 초기 북진정책 추진으로 11세기 꾸준히 영토 확장을 도모했습니다. 12세기초 여진족과의 관계도 북진 정책의 핵심은 같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하고 한때 동북9성을 축조한 것도 같은 취지입니다.
그러나 1115년 여진의 아골타가 '금'을 건국하고 강대국으로 성장하면서 외교정책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1125년 금송맹약으로 요를 멸망시키고, 고려에 사대를 요구하자 문벌귀족 이자겸이 굴복하였습니다. 게다가 1127년 북송마저 금이 멸망시키면서 고려는 북진 정책이 좌절되었습니다. 이후 고려는 외교 정책을 놓고 대립(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이 있었지만 고려초 북진 정책은 좌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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