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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안경곰147
빼어난안경곰14723.05.30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온건 언제인가요?

안녕하세요. 우리나라는 원래 불교중심의 국가였다가 현대에 와서는 천주교,불교, 기독교 등의 여러종교가 성행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으로 들어온건 언제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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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30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반도에 가톨릭이 전해진 시기에 대해서는 정확한 설명이 어렵다. 다만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 신부 등이 조선 땅에 왔었으며, 또한 이 와중에 일부 조선인 포로들이 일본에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세스페데스 신부는 기본적으로 가톨릭을 믿는 일본군을 위해 잠깐 조선 땅을 밟은 것이라 크게 전파되지는 못했다. 말 그대로 발자국만 찍고 간 셈이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나라에 끌려간 소현세자가 베이징에서 아담 샬 신부와 교제한 적이 있었다. 천주교만 받아들였다기보다는 천문학 등의 다양한 서적을 서학이라는 형태로 받아들였으며, 귀국하면서 중국인 신부들을 같이 데려가기로 했으나 소현세자가 70일 만에 급사하는 바람에 전파의 기회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갖고 온 서적과 물건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그보다 앞서 광해군 시절인 1610년에는 대문장가 허균이 청나라에 갔다가 기도문의 일종인 <제 12장>을 가져온 적이 있었다. 천주교 관련 서적으로는 최초로 여겨지고 있으며, 1614년에는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이탈리아인 신부 마테오 리치와 그의 저서 천주실의를 소개하기도 했었다. 그 뒤 이이명, 홍대용, 서호수 등이 천주교에 관심을 갖기도 했으나 홍대용은 학문의 입장에서 다소 비판적인 견지를 하고 있었으며, 서호수는 신부를 만나지 못하는 바람에 아무 소득도 없이 귀국하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조선에 가톨릭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성호 이익과 안정복에 의해서였다. 이익은 본인이 천주교를 믿지는 않았지만 학문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며, 안정복도 이후의 홍대용처럼 다소 비판적인 견지를 가지기도 했으나 천주교 자체에 대한 관심은 많았다. 이들의 집안을 중심으로 천주교 신자들이 생겼으며, 영조 시대인 1750년대에는 황해도와 강원도 지방을 중심으로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국내 가톨릭교회의 시작은 후술할 이승훈 베드로가 조선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성사를 받은 1784년으로 보고 있다. 지난 1984년 교황으로는 처음 한국을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목적이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및 천주교 서울대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이었던 만큼 이를 정설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위에 설명하는 것보다 5년 정도 앞선 1779년을 기념하려는 움직임도 있는데,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소재 천진암은 남인 계열 유학자 정약용, 이벽, 이승훈 등이 1779년부터 모여 천주교 서적을 읽었던,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꼽히는 곳으로, 이곳에 건설되고 있는 천진암 대성당은 이들이 모임을 시작한 지 300주년이 되는 2079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2016년에는 교황 요한 22세가 고려 충숙왕에게 1333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바티칸에서 발견되었으나,# 실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출처: 가톨릭/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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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역사적배경

    1592년 4월 일본의 풍신수길은 15만 7천여 명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 출정(出征)을 계기로 일본은 국내에 크게 퍼진 천주교를 없애고자 했다. 선봉장으로 천주교 신자들만으로 편성된 소서행장(小西行長 고니시 유키나가), 흑전장정(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를 비롯하여 오도순현(五島純玄 고지마 쥰겐), 천초종원(川草種元 야마쿠사 다네모토) 등 5만여 명이었다. 1593년 세스페데스 신부는 일본인 전교회장(후간 에이온)과 함께 소서행장이 머물고 있던 경상도 웅천성에 왔다. 왜군 신자들을 돌봐 주었으나 별로 전교 활동을 못하고 1595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임란 7년 후 일본으로 잡혀간 조선인 4만여 명 중에 장기(長崎)지방 근처에서 7천 명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후 덕천막부(德川幕府)의 금교정책은 1611년부터 1720년까지 1백여 년 계속되었다. 조선인 신자 7천 명도 모두 순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는 인질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데리고 갔는데, 북경에서 소현세자는 아담 샬 신부와 사귀게 된다. 세자가 북경에 있는 동안 조선인 2~3명이 세례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실학(實學)운동의 선구자는 지봉 이수광(1563~1628년)이다. 특히 마태오 리치 신부가 지은 책 "천주실의" 등을 보고 새로운 실학을 일으켰다. 이 서적이 전승되어 그 후 8대손에 이르러 천주교를 믿는 운동이 일어 나고 후손들이 순교하게 되었다.

    이수광의 실학운동이 이어 오는 중에 1백여 년 지나 천주교 연구 운동이 한강 유역 광주에서 남인 학자 이익과 그 문인들 사이에 일어났다. 특히 천주실의를 애독하면서 "천주는 곧 유가의 상제(上帝)와 같다"고 했다. 1760년 경에 이익의 제자 안정복을 비롯하여 선비들 사이에 천주교 서적을 서학[西學:서양에서 들어온 학문, 天學: 천주를 믿는 학문]이라 하여 크게 읽혀졌다.

    이익과 안정복 사이에 논의되던 천주교는 마침내 믿는 신앙 운동으로 발전 하였다. 거의가 남인파 학자들로 권철신.일신 형제, 이벽과 정약전.약종.약용 [1762~1836년, 다산(茶山), 요한] 삼형제 등이다. 이들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 주어사에 모여 천주교 교리연구 강학회를 열고 신앙운동을 일으켰다.


    우리나라 천주교의 공식 태동
    천진암 주어사 강학회에 참석한 이승훈(당시 27세)은 부친이 동지사로 북경 가는 편에 따라가 그 곳 천주당에 갔다 이벽의 부탁대로 거기서 40여일 머무는 동안 필담(筆談)으로 교리를 배우고, 1784년 2월 귀국 길에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 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조선인 선비로서 처음으로 세례를 받았다. 귀국 후 명례동[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을 중심으로 이승훈, 정약전 삼형제, 권일신 형제 등이 조선 교회를 창립 하였다.

    1784년 겨울부터 김범우의 집에서 주일(主日)행사를 거듭 한 것이 관헌에 발각되어 모였던 신자들이 모두 잡히게 되었다. 김범우는 태형을 받은 후 귀양살이에서 죽었다. 첫 번째 순교자이다. 1791년 신해년에 조상 제사 문제로 박해를 받았다. 이것이 그 후 1백년 동안 거듭되는 박해의 표면적 이유가 되었다.

    1801년 신유년 박해, 1839년 기해년 박해, 1846년 병오년 박해(조선교회 첫 김대건 신부 순교), 1866년 병인년 박해(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1871년까지 1만여 명 순교 : 일본은 1868년 구미 각 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근대화로서 명치유신이라는 정치 개혁을 하였다)

    1886년 한.불 수호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양국인이 서로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함으로써 종교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고, 1만 2천여 명의 신자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프랑스 성직자들은 자유롭게 전교하고, 개신교도 종교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1892년 명동 대성당이 세워졌으며, 1896년 대원군의 부인 민씨(고종의 어머니)가 마리아로 세례를 받았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행사에 교황 요한 바울로 2세가 한국에 왔으며, 수 많은 순교자들 중에 103위를 성인으로 선포했다. 전 세계 교회는 이 분들에게 합당한 공적 공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사는 한 마디로 박해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박해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첫째는 천주교가 제사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미풍양속을 해치는 그릇된 사교라는 이유였고, 두
    번째는 당파싸움과 연결된 정치적인 이유였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한국의 전통 제사를 미신으로 간주하여 엄격히
    금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죽은 이의 혼령(귀신)을 부르는 지방(紙榜)을
    써 붙이는 의식과 혼령이 제사 음식을 먹고 간다는 생각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에 와서는 제사의 본래적 의미를 이해하고
    교황청에서 인정하였다.

    이러한 제사 문제가 발생하자 남인들로 이루어진 파벌(시파, 時派)을
    적대시하던 벽파(僻派)에서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려고
    하였다. 1801년, 조정에서는 천주교 금지교서를 발표하고 전국적으로
    박해를 시작하여 300여명이 순교하였다.(신유박해, 辛酉迫害)

    교회에서는 박해하면 흔히 "4대 박해"를 꼽는다. 신유박해를 비롯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 등이다.

    이 가운데서도 신유박해와 병인박해 가 가장 규모가 크고 신자들의 희생도 컸다.
    병오박해는 최초의 한국 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의 체포로 그 파장이 컸다.
    그러나 이 박해 외에도 을사박해, 신해박해, 정해박해, 을해박해 등 전국 각지에서
    1876년 개항 때까지 숱한 "피"의 박해가 계속 이어졌다.


    신유박해
    1801년(순조 1년),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섭정을 하면서
    금교령을 내리고 전국의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일으켰는데, 그 규모가 하도 커서 '신유대박해'로 불릴 정도이다.

    정조의 국상이 끝나자 주문모 신부를 비롯해 이승훈, 정약종,
    홍낙민, 홍교만, 최필공, 최창현, 강경복, 김현우, 최인철 등이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됐다.

    전주에서는 이우집, 윤지헌, 김유산 등이 잡혀 순교했으며
    이존창은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했다.

    신유박해는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백서' 사건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이 때 황사영과 함께 옥천희, 현계흠 등이 참수됐다.

    신유박해로 희생자 수가 100여명, 유배된 자 가 4백 여명에 이르렀다.


    기해박해
    1839년(헌종 5년), 기해대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
    등 세 선교사가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조선의 아녜스"라 불리는 12살의 이봉금(아나스타시아)과 그의
    모친 김 아가다도 이 때 옥중 순교했다.

    이밖에 오종례, 홍재영, 이광헌, 남명혁, 권득인, 김아기, 박아기,
    이소사, 김업이, 한아기, 박희순, 이광렬, 김로사, 김성임, 이매임
    등이 전주와 서울 서소문 밖 네거리 성지에서 순교했다.

    당시 기록인 "기해일기"에 의하면 순교자가 54명, 옥중이나 곤장에
    맞아 죽은 신자가 60여명에 이른다.


    병오박해
    1846년(헌종 12년) 김대건 신부가 경기도 은이 공소에서 최초로
    미사를 봉헌했다. 그러나 김 신부는 중국으로부터 선교사를
    모셔오려고 시도하던 중 연평도 근해에서 발각되어 그 해 9월16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고 현석문, 임치백, 우술임, 김임이, 이간난,
    정철염, 남경문, 한이형 등이 순교했다.


    병인박해
    1866년(고종 3년)에 시작되어 대원군이 실각했던 1873년까지
    계속됐다. 한국천주교회사를 통해 그 규모와 희생자 수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큰 박해였다.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레트니에르, 도리, 볼레, 푸르티네,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 의 프랑스외방전교회 선교사가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또 정의배, 우세영, 유정률, 남종삼,
    홍봉주, 전장운, 최형,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손자선, 정문호, 조화서, 손선지, 이명서, 한원서, 정원지, 조윤호,
    김면호, 김문원, 이연식 등이 순교했다.

    이 시기에 순교한 신자는 약 8,0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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