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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4

독일 총리 비스마르크의 생애와 업적?

안녕하세요.

독일의 총리 비스마르크의 생애는 어떻게 될까요?

그가 살아온 과정과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업적은 어떤 것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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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세기 후반 프로이센 왕국, 북독일 연방, 독일 제국 수상. 철혈재상, 직역하면 철의 수상이라는 뜻을 가지는 Eiserner Kanzler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절묘한 외교술로 19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을 주도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현대 사회보장제도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독단성과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점차 인기를 잃어가다 빌헬름 2세와 갈등을 겪고 정계를 은퇴하게 된다.

    그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정치

    철혈재상이라 하여 그를 전쟁광, 초강경파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비스마르크가 강조한 점은 열강들이 외교에서 고려하는것은 이상적인 고귀한 가치 추구(ideals), 헌법의 진보성이 아니라 국력 즉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것이다. 1848년 혁명시기 자유주의자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펜대를 굴리며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허송세월하다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반대와 주변국들의 압력으로 이전 상황 복귀로 돌아간 것을 보며 이상주의를 경계한 것이다. 독일 통일 운동이 현실적인 고려 없이 독일연방의 34개 제후국과 도시들의 합의로 이뤄지는 것은 이상적으로 옳을지 몰라도 불가능하며 그것도 외세까지 고려하면 현실적인 힘 없이는 어떠한 방법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외교 전략

    보통 널리 알려져 있는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재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쉽게 말해 그가 치렀던 덴마크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의 보불전쟁은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지 독일 제국의 정복 야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일화처럼 그는 전장에서 불구가 된 참전 용사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

    그 유명한 연설도 "국가의 대문제" 즉 독일 통일을 두고 한 이야기지 일반적으로 나 불도저요! 한 것이 아니다. 당시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대독일주의를 주창하며 대를 이어 알프스 이북독일 연방에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오스트리아, 커다란 중부유럽 통일국가를 이웃으로 두는 것을 나는 독일을 매우 사랑한다. 그래서 독일이 여럿이었으면 좋겠다[42] 경계하는 프랑스를 어떻게 배제하느냐였는데, 이것이 외교적으로 해결될 전망은 없었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시절 발생한 전쟁은 보오전쟁, 보불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는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외교관 출신답게 유럽 내 많은 국가들에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 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과 경제력, 그리고 실전에서의 증명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확보에 회의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재직 시절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얻었고 정작 이후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린 빌헬름 2세는 시원찮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충언을 마지막에라도 들었어야 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안 듣고 군함과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열강의 어그로를 끌 만한 짓만 골라서 일으키더니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가 져서 자신의 왕좌와 서프로이센 및 포젠, 엘자스-로트링겐, 북부 슐레스비히, 상슐레지엔, 벨기에 국경의 영토 일부를 잃었다. 이것은 또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발호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서 패배하는 바람에 독일은 남아 있던 동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대부분, 브란덴부르크 중 노이마르크 지역인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을 영구히 폴란드 및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고, 남은 영토마저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40년 간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독단적인 국정운영

    앞에서의 평가처럼 비스마르크는 수많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고수했고, 그것을 대체로 달성했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해당사자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순수한 국가이성(reine staatsräson)에 따라 움직였고 따라서 그는 수시로 적과 동지를 바꿨으며 절차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했다.

    비스마르크의 이런 행태는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결집시켜 정적들을 양산했고 대중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실무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28년간이나 비스마르크의 비위를 맞춰야 하다 보니 그런 생활에 넌더리를 낸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외무성의 정치부장인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Friedrich von Holstein)이다. 홀슈타인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전략에서 결정적인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이 연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 비밀조약이 러시아에게는 많은 이득을 주지만 독일이 얻는 것은 거의 없다고 확신했고, 또 비스마르크의 작품인 이 밀약이 갱신되면 다시 비스마르크가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빌헬름 2세는 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원했으나 결국 그는 조약이 종료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관용과 소통이 부족한 정치지도자가 오랫동안 독일의 정치무대를 독점하는 바람에 신흥강국 독일의 정치문화 낙후라는 결과가 만들어진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후,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조국이 파멸한 원인에 대해 분석했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평은 곱씹어 볼 만하다.

    출처: 나무위키 오토 폰 비스마르크


  • 굉장한비오리121
    굉장한비오리12123.05.14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열렬한 프로이센 국가주의자. 정치의 책략자. 비밀동맹과 강력한 군사력을 신뢰.

    피(血)와 철(鐵) - 강경정책. 필요할 때는 냉정히 전쟁이라는 수단 사용.

    But, 유화정책 혼용

    내부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갈등을 외교적 성공으로 해소

    독일 통일 후 - 유럽의 견고한 평화 수호자의 역할.

    베를린 회의 이후 유럽에 30년간 평화로운 시대 도래케함. 유럽 안정과 평화를 확보.

    그의 신념은 주변 상황을 안정시켜 자국을 발전시키려는 열망. 유럽의 안정은 실질적 목표를 달성하면서 나타난 부산물.

    대체적 평가 - 뛰어난 현실주의정치가. 한 시대의 마지막을 대표하며 장식한 뛰어난 정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