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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호랑이161
심심한호랑이16123.04.30

고려시대는 어느나라와 전쟁 및 교류 가 있었나요?

고려시대는 전쟁도 많았고 그만큼 외국과 접촉이 많았는데 어느나라와 주로 전쟁하고 교류가 있었을까요?

전쟁이 참 많았던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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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는 여러 나라와 교류를 하고 전쟁도 한 나라입니다.

    중국과의 교류는 물론 남쪽으로는 일본, 남양(동남아시아), 서역(중앙아시아) 등과도 교류가 있었습니다.

    고려는 주로 농기구와 식량을 여진,거란에 공급하고 은,모피,말을 공급받았고

    송나라 일본과는 금.은.인삼을 공급하고 서적 비단 악기 유황 수은등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는 거란과의 전쟁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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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문신중심의 사회를 이루다보니 잦은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 안아야 했습니다. 대표적인 전쟁이 몽고의 침략을 들 수 있습니다.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공격해 들어오는 적을 막을 수 없어서 부처님의 법력으로나마 막고자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를 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고 100년 간의 지배를 받는 치욕스런 역사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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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교류는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웬수인 거란이랑 정말 여러차례 싸웟고 결국에 거란을 이긴 위대한 나라빙ㅂ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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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30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는 북진 정책을 썼으므로 북방 민족과 충돌이 잦았고, 송과는 비교적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지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과는 원의 강요로 뜻에 없는 정벌을 2차나 하였고, 고려 말엽에는 왜구의 침입이 찾아 평화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란은 916년에 건국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몽고 지방의 주인공이 되어 고려 정종 때에는 국호를 요라고 고쳤습니다. 고려는 요와 국초 때부터 대립을 하여 왔으나, 요가 발해를 멸망시킨 후에는 국교를 끊고, 정종 때에는 광군을 조직하여 북진 정책을 세우고 그 침입에 대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양국 간의 긴장된 국교 관계의 결과, 제1차로 성종 12년에 소손녕이 대군을 거느리고 침입하였습니다. 그들이 침입한 목적은 고려로 하여금 송과의 접촉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서희는 소손녕과 요와 통교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담판을 짓고 그들을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한편, 서희는 그 이듬해부터 교통로를 개척하기 위하여 청천강 이북의 여진을 정벌하고, 강동 6주를 개척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고려의 영토가 압록강에까지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고려는 요와 국교를 텄지만 송과도 친교를 계속하였으므로, 때마침 강조의 정변이 있자, 요의 성종은 이것을 구실삼아 제2차로 현종 원년에 재침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이들을 맞아 흥화진(지금 의주)에서 양규가, 통주(지금 선천)에서 강조가 크게 싸웠으나 개경이 함락되어, 현종은 나주로 피난하였습니다. 이리하여, 현종은 볼모로 하공진을 요 성종에게 보내어 왕의 친조를 조건으로 요를 물러가게 하였습니다.


    그 후, 고려는 친조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요는 강동 6주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에도 응하지 않았으므로, 제3차로 현종 9년에 소배압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주(지금 구성)에서 강감찬에게 거의 전멸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은 오랜 싸움은 피차간에 손실만 컸으므로, 고려는 송과의 친교 관계를 끊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으로써 요도 고려 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요구를 포기하게 되어, 양국 간의 국교는 회복되었습니다.


    요와의 전쟁에서 성의 필요를 느껴, 현종 때에 왕 가도로 하여금 개경의 나성을 쌓게 하였습니다. 또, 거란과 여진에 대비하기 위하여, 덕종 때에 유소로 하여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함경 남도 정평 해안인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정종 때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와의 전쟁으로 많은 문화재가 불타 버렸으므로, 현종 때에 김심언 등으로 하여금 태조로부터 목종까지 7대 사이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 전쟁을 계기로 대장경이 판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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