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어떻게 거리를 측정하였나요?
현대 사회에서는 거리를 측정할때 최첨단 방법으로 거리를 측정할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어떤 방법으로 거리측정을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리고차(記里鼓車)가 있습니다. 기리고차는 거리를 재는 수레로 톱니바퀴의 움직임을 이용한 원리도 거리를 측량하여 오늘날 택시 미터기와 비슷합니다. 세종 23년인 1441년에 처음 선을 보여, 지도 제작과 토목공사 등에 널리 이용되었습니다.
수레에 앉은 사람 옆에 종과 북이 달려 있는 것과 수레 내부에 세 개의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설치되어있다습니다. 세종이 온천욕을 하러 갈 때 1리(里)를 가면 기리고차의 종이 여러 번 울리고 5리를 가면 인형이 북을 한 번 치고, 10리를 가면 북이 여러 번 울렸다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자동으로 이뤄졌습니다. 다만 북이 울릴 때마다 사람이 책에 기록을 해야 했기에 기리고차는 반자동 거리 측량 수레에 해당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41년(세종 23) 기리고차(記里鼓車.거리를 기록하는 북 달린 마차)라고 하는 수레를 이용하여 거리를 측정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기리고차는 겉으로 보면 말이 끄는 수레에 말을 모는 사람과 수레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이는 평범한 모습인데 다만 수레에 앉은 사람 옆에 종과 북이 달려 있는 것과 수레 내부에 세 개의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 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거리를 측정하는 기준으로는 척(尺)·보(步)·리(里)·식(息) 등이 있었다.
흔히 쓰고 있는 자(尺)는 일반적으로 주척(周尺, 6치 6푼자)이었으며, 주로 도로나 토지의 측정에 쓰였다.
또한 6척은 1보, 360보는 1리, 3,600보는 10리, 1식은 30리라는 규정이 있었다.
흔히 도리식수(道里息數)라고 해서 30리를 1식의 단위로 사용했다.
조선시대의 역로는 대개 30리마다 1개 역을 설치해 운영했으며, 이 역에 도착하면 휴식을 취하게 했다.
우리나라 고지도를 보면 남북 3,202리, 동서 1,230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국토를 실측한 것이다.
1보는 약 1.5m로 산출했는데 사람의 두 발이 모두 진행되었을 때를 1보로 정해 사용했다.10리는 보통 4km 정도로 알고 있으나 조선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약 5.4km에 해당된다.
10리가 약 5.4km, 1보가 약 1.5m라는 옛 지도(대동여지도)상에서의 계산과는 별도로, 보척 또는 10리의 단위가 축지적인 면에서 시대에 따라 어떤 값으로 환산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과제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승량지법이라 하여 새끼줄로 거리를 측량하는 극히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었다.태조 2년(1393년)에 궁전의 형세도를 만들 때 새끼줄을 가지고 측량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런 방법은 토지뿐만 아니라 산성이나 읍성 등의 축조시에도 이용했다.
그 후 세종 23년(1441년)에 기리고차(記里鼓車)가 발명되었다.기리고차는 거리 측정 장치가 부착된 수레로 10리를 갈 때마다 스스로 북을 울리도록 고안되었는데
오늘날 자동차에 부착된 미터계와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 기리고차는 용도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23년에는 신조보수척(新造步數尺)을 사용해 각 도의 역로를 측정했으며,
30리마다 1표(標)를 세우거나 돌무더기를 쌓거나 나무를 심어 이를 표시했다.
오늘날의 도로에 설치된 거리 표지판과 같은 용도라고 볼 수 있다.
세종 25년에는 기리고차를 이용해 각 도와 각 읍 간의 거리를 실측 조사했다.
세조 13년(1467년)에는 규형(窺衡)이라는 거리 측정 기계가 발명되어 실용화되었다.『세종실록』은 이 기계를 ‘땅의 원근을 측량하는 물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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