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호가 유명해지기까지 누구의 공이 가장 컸다고 볼 수 있나요?
인상파의 대표적인 화가 고호는 살아있을때 보다 죽어서 더유명해졌는데요.
물론 고호의 작품성 뒤에 누구가의 마케팅 전략이 있었을거라 보는데 누구의 공이 가장 컸을까요?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흐가 죽고나서 고호의 동생도 죽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영향이 큽니다. 동생 테오와 주고받은 무수한 편지들을 통해 작가일생의 흔적이
호사가들에게 좋은 마케팅포인트가 됐다고 합니다.
생전 2,000여 점의 작품을 그렸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단 1점도 팔지 못했던 고흐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던 것은 동생 테오였습니다. 테오는 당시 파리에 있는 구필화랑의 화상이었습니다. 그는 매달 약 600만 원에 달하는 월급을 받으며 사랑하고 존경하는 형 고흐가 화가로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매달 150만 원에 가까운 돈을 후원했다고 합니다. 동생 테오는 반 고흐의 작품 세계를 인정한 첫 번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고, 상업적 관점에서 보면 그에게 반 고흐는 전속작가였던 셈입니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200여 통의 편지를 쓰면서 자신의 예술적 탐구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편지의 한 구절입니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보통 사람들이 자연을 더 잘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는 사람이야”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살아 생전 무명 이였던 고흐를 세상에 알린 사람은 동생 테오의 아내인 요안나 라고 합니다. 정신병자 취급을 받던 말년의 고흐가 병원에 입원했을 즈음, 테오와 요안나는 결혼한다고 합니다. 결혼한 지 2년여가 흘렀을 때 고흐가 세상을 뜨고 테오도 갑작스러운 병으로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후 죽음을 맞는다.고 합니다. 미망인이 된 요안나의 당시 나이는 고작 스물아홉이었다고 하지요. 요안나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형의 그림을 물려받는다고 합니다. 팔리지도 않는 정신병자의 그림을 쓸데없는 짐이라 여겼을 법도 할수 있지만 요안나는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남편과 고흐가 주고받은 많은 양의 편지를 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형제애에 한번 놀랐고, 고흐의 투명한 정신과 감성의 깊이에 또 한번 놀랐다고 하네요. 요안나는 고흐가 멀쩡한 지성인임을 확신했고 그리고 화상(畵商)으로 활약하던 남편의 인맥을 동원해 암스테르담에서 고흐의 전시를 열고 그 이후로 드디어 고흐의 그림에 세상에 알려 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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