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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
아하그렇구나생각하면 아하!!23.11.13

병자호란때 의병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 인가요?

임진왜란때와는 달리 병자호란때에는 의병이 없었다고 들었는데요.

어떠한 이유때문에 병자호란때에는 의병이 없었다고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역사적인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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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8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대피하여 항전하였으나, 강화도 함락 및 왕족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더 이상 저항할 의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의병을 일으킬 만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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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때도 의병이 일어나긴 했습니다. 그러나, 미미한 수준이었습니다.

    청태종이 12만의 군사를 이끌고 1636년 12월 1일 침략을 시작하여 불과 보름 정도에 남한산성 까지 왔으니,파죽지세였다고 보면 될것입니다. 항전다운 항전을 해ㅐ보지도 못하고 항복했기때문에 의미있는 의미있는 의병활동이 없었다고 보시면 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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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1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때 의병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비교해보자면 매우 적었지요. 일차원적인 의병 개념은 일종의 자위대 성격이라 정규군이 무너진 상황에서 자신들의 지역을 직접 지키기 위한 자율적인 군사행동이었으므로 병자호란 당시에도 후금군의 직접적인 진공로이자 전장이 된 평안도 지역에서는 당연히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모두 전쟁 발발 직후에 인조가 직접 각지에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명령을 내렸기에 호남과 경상지역에서 의병이 모집되었고 호남지역 의병 1만여 명은 북상하여 남한산성 근처까지 진출하였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해산하였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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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정치적 혼란, 경제적 파탄, 사회적 불안이 연속되면서 왕조를 중심으로 한 당국과 백성 사이에 일체감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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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왜군의 잔인한 행위에 격분한 유생들과 일반 백성 그리고 천민들까지도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일어나 왜군에 대항하여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기도 하고 부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궁을 버리고 분조를 편성하여 선조는 의주로 피신하고 광해군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를 돌아다니며 군과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난이 끝나고 선조는 논공행상을 벌여 자신을 보위하거나 명령을 수행한 자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렸으나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상은 고사하고 오히려 문책을 하게 됩니다. 이런 여파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병자호란 때는 대대적인 거병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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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은 약 7년간에 걸친 장기전 이였습니다. 하지만 병자 호란은 3개월 미만의 시기적으로 짧은 기간 입니다. 이때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인조의 도주로가 막혀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밖과의 연락이 끊겨 근왕군과도 소통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의병이나 승병 활동을 독려할 수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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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노인옥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당시 의병이 없었던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는데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는 충남 공주까지 도망가는 수모를 겪었다고 합니다. 이괄의 난 후에 조정에서는 또 반란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군의 검열을 매우 심하게 하고 훈련도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이에 의병장이 될만한 인재가 없었던 것인지 기록으로 남은 의병장이 없었던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조로 인해 조선 군은 아주 무능력한 군대가 되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와 [추천] 부탁드려요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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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의병이 있었습니다. 특히 호남 지역의 의병이 두드러졌습니다. 청의 침입 소식이 전해지자 옥과현감 이흥발·대동찰방 이기발·순창현감 최온·전한림 양만용·전찰방 유즙 등이 자진하여 의병 모집에 앞장섰습니다. 인조 14년(1636) 12월 19일 포위중인 남한산성에서 위급을 알리며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과 무기를 수집하여 청의 침략군을 무찌르라는 교서가 전달되자 의병 봉기의 움직임은 더욱 박차를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병을 이끌고 남한 산성으로 향했으나 인조의 항복으로 제대로된 싸움을 하지 못하고 해산되었습니다.

    정묘호란 당시 일으킨 최효일은 병자호란때도 홀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강서에서 사는 만호 정지성은 촌가에 있다가 난을 당하자 보보산성(保寶山城)에 들어가 적군을 물리치고 백성을 구했습니다. 황해도에서도 김응남이 멸악산을 근거로 활약했습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 김식회가 의병을 일으켜 퇴각하는 경상감사 심연의 부대와 함께 잠행하며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또 그는 인조가 남한산성에 있을 때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가 50여명의 살해했습니다.

    다만 병자호란은 1636년 일어난 그해에 강화함으로써 단기간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에 비해 활약 기간이 짧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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