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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한발발이142
로맨틱한발발이14223.06.17

조선시대 홍경래의난 진압되고 이후 생활이 바뀌었나요?

조선시대 평안도에서 탐관오리의 수탈과 자연재해, 전염병이 겹치다보니 몰락양반 홍경래가 농민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하지만 정부에서 100일만에 제압을 해서 난이 실패하게 됐는데, 이후에 농민들의 생활은 조금 개선되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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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300년 동안 소외되었던 평안도,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다

    조선은 전국의 지방을 8도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8도 가운데 조선 지배층의 상당수는 이른바 삼남지역이라고 불리던 영남·호남·호서 지역에서 배출되었다. 한반도의 북부 지역에 위치한 함경도와 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다. 단, 함경도의 경우 조선 건국의 기틀이 되었던 지역으로 왕가의 발상지로 인식되며, 이른바 풍패지향(豊沛之鄕 ; 패주 풍읍 출신으로 황제가 된한나라 고조의 유사에서 유래)으로 불리며 그 나마 중앙 정부의 관심이 쏠리기는 하였으나 평안도는 그렇지 못하였다.

    물론 조선 정부에서 지방민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으로 평안도 지역 일부 인사를 특채로 채용하기도 하였으나 제한적이었다. 그런 때문인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평안도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 사대부는 이들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는다.”라고 실정을 토로한 바 있다.

    오랜 기간 소외되었던 평안도는 조선후기에 들어서며 변화의 기운을 맞이하였다. 변화는 주로 경제적인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유상(柳商: 평양상인)이나 만상(灣商: 의주상인)을 중심으로 대청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더하여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광산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는데, 일부 광산은 이른바 잠채(潛採)라 하여 불법적인 형태로 채광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가 축적되는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수탈은 점차 더욱 가중되며 사회적 모순이 확대되어 갔다.

    홍경래와 농민군이 꿈꾸던 세상은

    지도부를 구성한 홍경래는 평안도 가산의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아 봉기를 위한 재원을 마련함과 동시에 광산 개발을 명분으로 내걸고 사람들을 모집하였다. 이에 응했던 사람들은 대개 생활이 어려운 농민층으로, 홍경래는 이들을 봉기군으로 조직하고 군사 훈련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준비가 진행되던 중인 1811년 전국적으로 대흉년이 들었다. 특히 평안도는 가장 피해가 극심하였다.

    홍경래는 이때를 봉기에 적당한 시기로 판단하고, 다복동을 중심으로 봉기의 기치를 올렸다. 대원수 홍경래를 중심으로 부원수에 김사용, 선봉장에 홍총각, 후군장에 이제초를 배치하고 우군칙과 김창시는 모사(謀士)로 활동하였다. 홍경래 등은 봉기와 함께 격문을 공포, 자신들의 봉기에 대한 명분을 대외적으로 천명하였다. 격문의 일부를 옮기면 아래와 같다.

    “조정에서는 서토(西土 : 평안도)를 버림이 더러운 땅과 다름이 없다. 심지어 권세 가문의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를 보면 반드시 평민놈[平漢]이라 일컫는다. 서토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은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에 당하여서는 반드시 서토의 힘에 의지하고 또한 과거를 볼 때는 반드시 서토의 문장을 빌었으니 400년 이래 서쪽 사람들이 조정을 저버린 일이 있는가.”

    봉기 후 저항군은 남북 진영으로 나누어 행동을 개시하였다. 봉기 초반 농민군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부가 서울로 진격하면서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하였다. 가산과 곽산 관아를 접수한 봉기군은 곧 창고를 열어 저장된 곡식으로 빈민들을 구휼하고 무기 등을 빼앗아 전투력을 강화하였다. 초반 농민군의 기세는 대단하여, 이후 정주·선천·태천·철산·용천·박천 등지를 접수하였다. 초반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봉기군은 그러나 박천의 송림 전투에서 패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송림에서 패전 이후 봉기군은 다시 전열을 정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관군의 반격이 이루어지며 봉기군이 장악했던 지역은 서서히 관군의 수중으로 다시 넘어갔다. 여기 저기 전투에서 패한 봉기군은 마침내 정주성으로 집결하였다. 이후 3개월 동안 정주성에서 이루어진 봉기군의 저항은 처절하였다. 계속되는 진압군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적극적이면서 조직적으로 대응하였다. 정주성 밖에서는 관권에서 이탈된 민심이 성에서 농성하는 봉기군을 도왔다. 홍경래 등 지도부는 진압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한편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라고 하여 민심을 회유하기도 하였다.

    대치가 계속되면서 진압군측에서는 정주성의 함락이 여의치 않을 것으로 판단, 1812년(순조 12) 3월부터는 성 자체를 폭파시키기 위한 작업을 진행하였다. 마침내 4월 18일 폭발물 매설을 위한 굴착이 마무리되고, 다음 날 화약을 매설하여 성을 폭발시킨 뒤 관군이 성내로 진입, 봉기군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전사하고, 대부분의 지도부가 검거되었으며, 약 2,938명의 봉기군이 체포되었다. 한편 관군의 진압과정에서 이들과는 달리 이른바 의병이 조직되어 농민군의 진압에 참여하였다.

    홍경래와 농민군이 봉기하면서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홍경래와 농민군은 일단 지역 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꾸었다. 그리고 더하여 부패한 정권의 타도를 꿈꾸었다. 부패한 정권 타도 뒤에는 새로운 구세주인 진인(眞人)이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다. 이른바 진인출현설로, 지배세력의 부정을 넘어 ‘이씨왕조’의 타도까지 꿈꾸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그러나 한계도 있었다. 신분제 폐지나 토지 개혁, 그리고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삼정(三政: 전정·군정·환정)에 대한 개혁 조치 등이 없었다는 점 등이다.

    죽어서도 ‘혁명가’로 다시 부활한 홍경래

    홍경래는 정주성에서 죽었으나, 당시 핍박받던 농민들은 “정주성에서 죽은 홍경래는 가짜 홍경래이다. 진짜 홍경래는 살아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곳곳에서 저항하였다. 1826년 청주 괘서사건의 죄인으로 국문을 받던 김치규는 홍경래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이 죽지 않았다고 진술하기도 하였다. 농민이나 변혁을 바라는 대중들에게 홍경래의 실제 생사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홍경래가 죽지 않았다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변혁의지를 키워갔다.

    한편 홍경래는 이후 혁명가로 또는 풍운아로 다시 탄생하였다. 일제시대 이돈화는 백두산인이라는 필명으로 천도교 기관지인 [개벽]에 기고한 글에서 홍경래를 장군이라 호칭하며, 시세(時勢)가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다시 시세를 만드는 것이 이치인데 홍경래와 같은 인물은 한 몸으로써 시세를 만든 자라 일컬었다. 또 이윤재는 1931년 [동광]에 기고한 글에서 홍경래와 봉기군을 혁명군이라 명명하면서 그들의 최후를 기술한 뒤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게 한다고 하며 실패를 아쉬워하였다. 일제시대 홍경래에 대한 이런 관심은 암울한 현실에 대한 돌파구의 차원에서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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