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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2

홍경래의 난의 결과와 영향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조선시대 농민들의 항거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것이 평안도에서 일어났던 홍경래의 난이라고 하는데요.세도정치의 결과 농촌경제가 파탄에 이르러서 일어났다고 하는데 홍경래의 난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고 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아시는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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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경래의 난 결과를 보면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습니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또한 부농과는 달리 소극적인 구실만을 담당했던 광범한 소농과 빈민층은 이후 임술민란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아갔던 것입니다.

    홍경래의 난 영향을 보면 이 난에서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가 구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평안도 지방이 주요 무대였지만 동시에 도성에서 소론 박종일을 중심으로 중인과 서얼층이 연계해 정권 탈취를 계획한 것이라든지, 기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층의 산발적인 소요는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출처 - 지식백과 홍경래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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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3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기군은 군사를 정비하기 위해 전략적 요충지인 안주에 병력을 집중할수 없는 어려움에 빠져 시간을 지체, 그 사이 전열을 정비한 안주의 관군과 12월 29일 박천 송림에서 격돌하였으나 패하고 그날 밤 정부정으로 퇴각해 들어가 전략상 수세에 몰리게 됩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동행하자고 역설해 정주성에는 관군의 노략질을 두려워한 박천, 가산의 일반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으며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 허항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전투에서 승리한 기세를 몰아 진격하는 관군에게 곽산 사송평에서 패전함으로써 군사를 해산하고 주요인물들은 정주성에 들어갑니다.

    한겨울 정주성으로 쫓겨간 봉기군은 매우 열악했고, 식량이 떨어져 죽는 이가 속출, 그 후 정주성의 봉기군은 한성에서 파견한 순무영군사와 지방에서 동원된 관군의 연합부대에 맞서 전투를 계속하면서 오래 성을 지켰으나 땅굴을 파고 들어가 성을 파괴한 관군에 의해 1812년 4월 19일 진압됩니다.

    이때 2983명이 체포되어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 전원이 일시에 처형, 홍경래는 전투 중 총에 맞고 사망하나 참수되고 홍총각, 김혜철 등은 바로 체포되었고 이희저는 실종되었다가 의병에게 잡혀 참수, 우군칙은 달아났다가 관군에게 체포됩니다.

    체포된 지도자들은 한성으로 압송되어 심문받은 후 사지가 잘려 전시되었고 지도자들의 가족 또한 재산이 몰수되고 노비가 되며 그 친척 역시 노비가 되거나 먼 지역으로 유배되었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에 대한 지역 차별과 정치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으나 토지 문제 등 사회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곡식 분배 등을 통해 빈민을 불러모으는 데 그쳤습니다.

    홍경래의 난은 당시 사회 발전을 바탕으로 지배체제의 외부에서 성장한 사회층이 주체적으로 봉기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중세 말기의 지배체제를 허물어가는데 중요한 단계가 되었으며 홍경래 사망 후 곳곳에서 벌어진 저항에 홍경래가 관여하고있다는 소문이 도는 등 홍경래의 난은 조선 전반에 파급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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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홍경래의 난


    1811년(순조 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순조 12년) 음력 4월 19일까지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넓은 의미에서의 농민 반란으로 시작하여 체제 저항입니다



    이 난은 주로 반군이 농민 몰락한 양반 관리등이 합세한 특이한 체제 변화를 요구한 집단입니다


    그래서 조정은 이 난의 중요성때문에 적극 제압하기로 결론



    결과



    관군의 초토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퇴각해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밖의 농민들의 협조와 또 지휘부에서도 부민(富民)에 대한 가혹한 징발을 통해 평등한 분배를 제공한 때문이었다. 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남정(男丁) 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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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봉기 초기 청천강 이북 8개 지역을 단숨에 장악하였으나 의견 대립 등으로 점차 수세에 몰리면서 반란군은 정주성(定州城)으로 퇴각하였다. 1812년(순조 12) 4월 19일 정부군에 정주성이 함락되면서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다.

    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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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11년 (순조 11년) 음력 12월18일 부터 1812년 (순조 12년)5월29일 까지 까지 평안도의 농민들이 일으킨 난으로 백성들이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습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어 일어났고, 한때 정주성을 중심으로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5개월 만에 평정되었는데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하고 내부에서 분란도 있었고 도중에 홍경래가 암살 기도를 겪기도 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홍경래의 난이후 정진인설로 대표되는 정감록이 백성들 사이에 유행하게 되었는데 정감록의 내용은 역성 왕조 교체와 계룡산 도읍설, 난세의 환란, 십승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조선 후기 이래 이상적 미래 세계를 대망해온 민중신앙과 관련이 깊은 한국의 대표적 예언서인데 이렇게 차츰 조선은 서서히 무너져 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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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결국,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 생포자 가운데 남정(男丁) 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라고 해서 아쉽네요 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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