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때 7차례에 걸친 해양대원정을 펼친 이유와 그 이후 대원정이 뚝 끊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5세기 초 명나라의 영락제 시절, 장군 정화를 시켜 7차례에 걸친 대규모의 남해로의 해양대원정을 펼쳤는데, 그 규모도 어마어마하게 초거대였고, 비용도 엄청났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명나라 영락제 왜 그 막대한 비용을 들여가며 오랜 기간 남해 해양대원정을 감행했었었는지?
또한 영락제와 정화의 사후에 대원정이 뚝 끊기듯 중단된 이유가 궁금하며
이 명나라의 해양대원정에 대한 역사적 평가, 역사적 의의 등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즐거운 나날입니다.
영락제는 정통 황제인 조카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정통성의 문제를
불식시키기 위한 목적의 여러 수단 중 하나로 해양 탐험을 허락합니다.물론 이 탐험을 이끈 환관 정화(鄭和)의 간청도 한 몫 했겠지요.
정화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모슬렘으로 아라비아 계통의 사람이었으며
기구한 운명으로 어린 나이에 거세되어 환관이 된 사람이었습니다.아라비아인 정화가 이끄는 탐험대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차례에 걸쳐 대탐험을 하지요.선단은 60여 척의 초대형 선박을 포함, 모두 300척이 넘는 배에
3만 명의 장병이 동원된 가공할 수준이었으며
항해 거리만 185,000 km에 이릅니다.그러나 북방민족의 핏줄인 영락제의 의도가 해양진출이 아니었고
단지 과시용이었기 때문이 이후 중단되고 말았다고 하지요.안녕하세요. 검소한오징어74입니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 강력한 힘과 문화력을 과시하겠다는 위해 동남아시아부터 아프리카까지 환관 정화가 이끄는 대함단을 통해 여러나라와 통교하며 조공외교를 통해 명의 존재를 각인시킨 작업이었습니다. 그 이후 다른 황제들은 북쪽의 몽골세력에 대한 견제에 집중하고 왜구의 잦은 해안침략에 해금정책으로 맞서면서 정화의 유산은 이어지지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