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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23

1979년 12 12 사태의 발생 원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1979년 신군부세력의 12 12 사태 발생 하는데요 박정희 대통령 사망과 더불어 시작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12.12사태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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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26 사건 이후 새벽 4시 김재규가 체포된 후 국방부 회의실에서 각료들은 서둘러 비상조치를 내렸다. 신현확은 대통령이 서거했고 그 범인은 김재규였다는 것을 알리며, 국가적 위기 상황에 국가원수직이 비어있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법에 의하면 대통령 유고 시 국무총리가 승계하도록 돼 있으니, 지금부터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 시해로 인한 계엄의 선포로 인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통령 권한대행과 함께 정국을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최규하는 이때 결정적인 실수를 하게 된다. 최규하는 권한 대행 수락 당시 "지금 이 순간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겠다."고 전국계엄이 아닌 부분계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사실상 최규하 스스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의 군 통제권을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전국에 비상계엄이 내려지면 총 책임은 대통령이 맡게 되지만 일부에 한해 계엄령이 내려지면 국방부 장관이 총 책임을 맡게 되기 때문이다. 원래 최규하는 정치에 휘말리기를 싫어했기에 정치적 부담감이 크다고 판단하여 제주도를 제외하고 계엄을 선포해버렸다. 이 때문에 계엄령 이후 '계엄사령부'가 유일한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수사 총책을 맡은 전두환이 더더욱 권력의 핵심으로 부각됐다. 거기에 국방부 장관이였던 노재현은 그릇이 부족한 사람이었고, 전두환과 각별했던 사이였기에 훗날 정승화와 전두환이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도 전두환을 두둔하기에 바빴던 인물이었다.

    그 와중에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철저한 원칙론자로, 정치에 휘말리기 싫어서 권력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을 스스로 막았다.[31] 실제로 권한대행 당시에 정승화가 계엄사의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어보자, 지금은 전국계엄이 아니라 부분 계엄이니 자신한테 보고하지 말고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하라 할 정도로 정치에 무관심했다. 이로 인해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어 10.26 사태 수사를 총괄하게 된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이 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하게 된다.[32][33] 그리고 계엄사령관 정승화 입장에서 전두환은 곧 숙청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당시 이미 전두환을 위시한 군내 비밀 사조직 하나회는 전두환의 동기생들인 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을 주력으로 서로 상부상조하여 군부 내의 요직을 하나 둘 차지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는 기존에 5.16 군사정변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기존 군부세력을 위협할 만한 수준으로[34] 군 내부에서도 이들에 대한 권력집중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또한, 기존에 정보활동을 하던 대통령 경호실[35]의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의 김재규가 동시에 무력화 되면서 사실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는 정보기관이 보안사밖에 남지 않게 되었고, 정보력이 국군보안사령부로 집중된 것도 전두환의 세력이 강화된 주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더욱이 전두환은 당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었으므로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중앙정보부와 검찰, 경찰 등 모든 정보·수사 기관들을 지휘 및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집중된 정보력을 이용해 전두환은 정치인들의 이러저러한 비리를 캐내어 이용하거나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10.26 사건의 수사 내용을 임의로 편집하여 보고하는 등,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고 자신의 신분과 지위를 망각한 채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정치에 관여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전두환은 10.26 사건 다음날 사건 수사를 빙자하여 윤일균 중앙정보부 제1차장 겸 부장 직무대리, 오탁근 검찰총장, 손달용 치안본부장 등을 보안사로 불러들여 국가원수 시해 책임을 물어 당신들을 다 잡아들여야 하지만 자신에게 협조하면 체포하지 않겠다는 압박을 하면서 사실상 자신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전두환은 중앙정보부, 검찰, 경찰, 헌병까지 장악한 실력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심지어 정부 각 부처 차관들을 불러들인 후 사실상 대통령인 양 굴기까지 했다.

    이러한 내용은 당연히 정승화에게도 보고되었고 정승화는 직접 전두환을 불러 "당신은 군인이지 정치인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대통령인 양 굴지 말라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한편 전두환은 김계원을 조사하던 중 김계원의 집에서 약 9억 원 정도의 수표 뭉치를 발견하게 된다.[36] 전두환은 이 돈을 먼저 박근혜에게 6억 원을 전달하고 노재현에게 5천만 원을 전달했다. 마지막으로 정승화에게 2억 원을 전달하려 했으나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핀잔만 들었다. 정승화는 이런 전두환의 월권에 화가 나서 노재현에게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뇌물을 받은 노재현은 전두환을 옹호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정승화는 노재현을 찾아가 전두환을 처벌해야 한다고 계속 요구했고, 특히 사조직이 군의 기강을 다 망치고 있다는 생각에 인사 개편을 통해 하나회 장교들의 기세를 꺾어놓으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정승화 총장은 전두환을 보안사령관 겸 합수부장 직에서 쫓아내기 위해 동해안경비사령관[37]으로 보직이동시킬 것을 계획하고 노재현 당시 국방장관과 상의했고[38][39], 하나회의 인사들을 군 핵심부 요직으로부터 밀어내어 제거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세운다. 그리고 당시 강직하고 청렴한 참군인으로 평가받던 갑종출신인 장태완 소장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으로 임명하는 등,[40] 하나회 측의 불온한 움직임을 원천봉쇄하기 위한 조치들도 서두른다.[41]

    노재현 장관은 전두환 보직이동에 관한 정승화 총장의 계획을 김용휴 국방차관에게 알렸고, 김용휴는 이를 전두환에게 전달했다.[42] 보안사의 정보력과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군부에 거대한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던 하나회 측이 정승화의 계획을 매우 빨리 감지한 것. 요직이란 요직은 모두 하나회가 장악했고 더욱이 당시에는 누가 하나회인지 정확히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정승화의 움직임은 이런 사조직의 인맥을 통해서 속속 전두환 측에 전해졌다.

    출처: 나무위키 12.12 군사반란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후 전두환, 노태우 등이 포함된 신군부세력이 군부 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연행하고 당시의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해 이를 승인받으면 일어났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79년 12월 12일 군부의 실세였던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군사반란 사건.

    이들이 이끌던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최규하(崔圭夏)의 재가도 없이 휘하 부대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을 강제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군사반란 사건이다. 유혈충돌이 수반된 하극상 사건이었다.


    12·12군사반란·12·12하극상·12·12쿠데타·12·12쿠데타적사건 등이라고도 한다. 신군부 세력은 이 사건으로 군 내부의 주도권을 장악한 뒤 1980년의 5·17사건을 일으켜 새로운 권력을 획득하였다.


    5·17사건은 명백한 정치적 쿠데타로 간주될 수 있지만 12·12사건 당시에는 신군부의 정권장악 목표가 아직 명백하게 표출되지 않았으므로 12·12군사반란은 예비 쿠데타로 간주되기도 한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