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

조선시대 '김육'이라는 사람이 대동법 개혁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조선시대 정치적 당파간의 대립이 가장 강렬했던 시기에 '김육'이라는 사람이 대동법을 끝까지 밀어부쳐 개혁이 성공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무엇인가요?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김육은 인조때부터 충청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대동법 자체가 필요한 지역은 전라도나 경상도도 마찬가지였지만, 충청도가 실시되면, 도미노현상으로 전라도나 경상도도 실시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대동법 자체를 대다수 관료들이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대동법은 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김육은 충청도에 확대실시하는데 성공했으며. 충청도가 성공하자, 전라도와 경상도로 이어졌고, 황해도와 함경도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마침내 대동법은 전국적으로 확대실시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왕의 전폭적인 지지와 김육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49년 5월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대사헌이 되고 이어서 9월에 우의정이 되자, 대동법의 확장 시행에 적극 노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동법의 실시를 반대하는 김집(金集)과의 불화로 이듬해 1월에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물러앉아 다시 진향사(進香使)로 중국에 다녀왔습니다.

      71세의 늙은 몸을 무릅쓰고 중국에 다녀온 뒤, 잠시 향리에 머무르다가 이듬해 1월에 영의정에 임명되고, 실록청총재관(實錄廳摠裁官)을 겸하였습니다.

      대동법의 확장 실시에 또다시 힘을 기울여 충청도에 시행하는 데 성공했고, 아울러 민간에 주전(鑄錢)을 허용하는 일도 성성공하습니다.

      그리고 12월에는 원임(原任) 정태화(鄭太和)가 영의정에 복귀함에 따라 좌의정으로 지내면서도 대동법 시행에 따른 몇 가지 문제점을 개선하는 한편,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을 저술하고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완성하기도 하였습니다.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에 오르자 대동법의 실시를 한층 확대하고자 「호남대동사목(湖南大同事目)」을 구상하고, 이를 1657년 7월에 효종에게 바쳐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건의에 대한 찬반의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죽어, 이 사업은 유언에 따라서 서필원(徐必遠)에 의해 뒷날 성취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