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의의 난은 실제로는 이성계가 일으킨것인가요?
조사의의 난을 보면 조사의가 직접 군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운 부분들이 상당히 많고 이후 처벌도 역모임에도 관대한 수준으로 이루어지는데 실제로는 이성계가 주모자고 조사의를 난의 주동자로 뒤집어씌운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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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으로 방번과 방석이 희생되었습니다. 안변부사 조사의와 신덕왕후 강씨(태조 이성계의 계비)의 조카 강현은 그 원수를 갚는다면서 태종 때인 1402년 태상왕 태조 이성계를 등에 업고 봉기하였습니다. 안변을 중심으로 동북면 전 지역이 거점이며 여진족의 참여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박순 송류 등을 파견하여 반군을 회유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을 당합니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선봉 이천우를 격파하였으나 그후 관군이 군을 재정비하고 공격하여 반군을 제압하고 조사의는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세종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상왕(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박만은 성품이
물러서 태상(태조)의 명을 어길 수 없었을
것이며, 또 박만 등의 일을 어찌 일일이
법대로만 할 수 있겠느냐' ..."라는 말이
있는것으로 보아 난이 일어날 당시의 태종의 친정 과정 등을 볼 때, 조사의의 난이 태조가
주도한 것임은 거의 틀림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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