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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8.27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관이 있나요?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 의해 시해 되었던 사건이 있을때

일본군과 흥선대원군이 같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말인가요?

그럼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어떤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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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일 전쟁 중에 조선에서의 내정 개혁(갑오개혁)을 주도했던 일본의 이노우에 공사는 삼국 간섭에 의해 국제적으로 일본의 위상이 저하된 것을 계기로 조선에서의 주도권 행사가 여의치 않게 되었습니다. '300만 엔 차관' 제공 등의 회유책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증대하자 조선에서는 1895년 7월 이른바 친러파 정권이 성립되었다. 러시아가 일본과 본격적인 무력 충돌을 일으킬 의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본은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조선 주재 공사를 미우라 고로 육군 중장으로 교체하고 대원군을 이용해 친일파 정권을 부활시키기 위한 궁중 쿠데타를 획책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라고 합니다.

    일본은 자국은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음을 발표하였다. 일본은 언론을 통해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의 권력다툼의 일환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한편 미우라는 훈련대 군인들이 궁궐에 침입한 죄로 이들을 엄벌할 것과 일본인이 이 돌연사건에 연루된 사실을 규명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일본에 이용되어 경복궁으로 들어와 행동을 규제받았으며, 훈련대 군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동안 경복궁 안에서 보초를 서고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인물로 섭정을 하면서 곳곳에 척화비를 세워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고종의 왕비가 명성황후는그런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놓고 마찰을 벌입니다. 결국 10년만에 권력에서 물러나고 그 ㅊㆍ리를 명성황후와 민씨들이 장악하여 횡포를 자행하다 1882년 구식 군인들의 급료지급 문제로 임오군란이 발생하여 명성황후는 충주로 피신하고 대원군이 복귀하게 되는데 복귀 후 청나라가 개입하여 군대에 의해 텐진으로 끌려가버립니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혼란스러운 정국에 일본이 개화파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아 3일만에 실패로 끝나고 1895년 을미년에 일본은 여우시냥이라는 작전명으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이를 대원군의 소행으로 조작하려고 했으나 대원군이 제때 나타나지 않자 계획은 새벽에 이뤄지는데 이를 러시아공사가 다 지켜보고 있었고 고종은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이뤄집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선대원군은 며느리 명성황후와 사이가 안 좋은 것은 사실 이였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배후에 흥선대원군이 있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아들인 고종은 이러한 아버지와 절연을 했다고도 하지만 흥선 대원군이 직접적으로 명성 왕후의 시해 사건에 배후였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때에 흥선대원군이 입궐하였으나, 명성황후를 해치는 것이 흥선대원군의 뜻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미 죽은

    그녀를 폐비(廢妃)한 것은 흥선대원군의 뜻이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을미사변을 주도했고 실행 역시 일본인들이 했지만 흥선대원군은 명분 면에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을미사변 전 8월 16일 일본인 궁내부 고문관 오카모토 류노스케는 공덕리에 있는 흥선대원군의 별장을 방문, 그는 별장 사랑에서 흥선대원군에게 자신들이 명성황후 일파를 축출해 주는 대신 거사 후 대군주를 보필해 궁중을 감독하되, 정사는 내각에 맡겨 일제 간섭하지 말라는 것, 이준용을 3년 기한으로 일본 유학을 보내라는 등 4가지 조선의 사실상 대원군의 정계은퇴를 강요하는 각서를 제시, 자필확인을 받아내며 실행일자는 적당한 날을 택해 흥선대원군에게 통보하기로 합니다.

    일본은 출발에 앞서 명문 확보를 위해 흥선대원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 취지를 밝히는 고유문을 발표하게 했고 그것을 한양시내에 붙입니다.

    을미사변동안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내 강녕전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태의 진전을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