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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슴새216
우람한슴새21623.12.08

강조는 어떠한 인물이기에 고려의 목종까지 죽이고 정변을 일으키나요?

올해 고려거란전쟁 드라마가 꽤 인기있는데요.

당시에 강조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어떤 인물이었기에 고령이 목종까지 정변을 일으키게 되는지 자세한 배경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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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에 대한 출신 기록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강조는 신천 강씨 집안일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강조는 고구려계 패서 호족 계열의 인물로 보입니다. 강조는 강태주의 아들로 왕건의 먼 외척입니다. 993년 성종의 하급 궁료로 천거된 이후 무관으로 출사하여 목종 때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습니다. 목종이 부름을 받고 숙위를 위해 출병했지만 목종, 김치양을 제거하고 대량원군을 즉위시켜 이부상서참지정사가되어 제일의 실력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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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10년(현종 1)에 목종은 병이 들어 후계자를 대량군(현종)으로 정하고자 하였으나 천추태후와 그녀의 불륜 상대인 김치양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자 하였습니다. 목종은 출가하여 절에 있는 대량군을 궁으로 부르는 한편 서북면 도순검사인 강조 또한 궁으로 돌아오라고 명합니다. 강조는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항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목종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으나 계속 개경을 향해 진군합니다. 개경에 당도하여 김치양과 그의 아들을 죽이고 목종과 천추태후를 유배보냈습니다. 유배 도중 목종은 시해됩니다. 이름하여 강조정변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나라 성종은 강조정변을 기회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해 옵니다. 양규장군이 홍화진에서 결사항전의 자세로 임하자 성을 함락시키지 못한다고 판단해 10만 대군을 우회하여 개경을 향해 진군을 계속하여 행영 통도사의 지위에 있던 강조는 30만 대군을 이끌고 맞서 싸우다 대패하여 사로잡히게 되었고 결국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를 받아들여 작전상 후퇴를 택한 것입니다. 요의 성종은 현종의 출조를 약속 받고 군사를 물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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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 사이에 결혼이 행해졌고, 목종의 아버지 경종은 두 왕후를 얻었는데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와 헌전왕후로서 이들은 모두 태조의 아들인 욱의 딸로 경종과는 모두 사촌남매 였습니다.

    경종의 숙부이며 태조의 아들인 욱은 경종이 죽은 뒤 그의 왕후이며 질녀가 되는 헌정왕후를 사간해 해량원군 순을 낳았는데 이가 바로 뒤의 현종입니다. 한편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는 경종이 죽은 뒤 천추궁에 거처하게 됩니다.

    이때 외척 김치양이 가짜 중이 되어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추한 소문이 돌자 성종이 김치양을 장배했고 성종이 죽고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하나 헌애왕후가 섭정을 하여 스스로 천추태후 라 부릅니다. 그리고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을 삼고, 뒤이어 우복야겸삼사사에 임명하는 등 권세를 맡겨 백관의 진퇴가 그의 손에 달리게 됩니다.

    1003년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생기자 천추태후는 김치양과 더불어 목종에게 아들이 없음을 기회로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려 합니다. 그러나 당시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모의는 태조의 유일한 혈통인 대량원군 순이 존재한다는 난관에 직면,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출가시켜 개성 숭교사에 머물게 하다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게 하고 여러 번 독살하려 하나 목적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김치양 일파는 1009년 목종을 살해하려 대궐에 불까지 놓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놀란 왕은 병석에 눕게 되니 , 음모를 알게 된 목종은 이런 사건이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에 중추원부사 채충순 등과 의논해 선휘판관 황보유의와 낭장 문연 등 신혈사에 보내어 대량원군을 맞아오게 하는 한편 서경의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명해 상경해 호위하도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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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제7대 왕 목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게 되자, 귀양보냈던 천추태후의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을 다시 불러들였다. 목종은 20세가 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였는데, 1003년(목종 6)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 때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목종의 뒤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음모를 안 목종은 욱(郁)의 아들 당숙 대량군(大良君)에게 자기의 뒤를 잇게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에게 왕궁을 호위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나라 안에는 온갖 뜬 소문이 유포되었는데, 임금은 병환이 몹시 위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김치양 일파는 임금이 병중에 있음을 기화(奇貨)로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이번에는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나돌게 되었으며, 이렇게 되자 강조는 김치양 일파를 몰아내고 목종의 뜻대로 대량군을 임금의 자리에 앉히려고 하였다. 강조가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개경으로 오던 도중에 목종이 아직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강조는 어차피 목종으로서는 나라를 흥하게 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여, 부하 제장(諸將)과 의논한 후 별장(別將)으로 하여금 대량군을 맞이하게 하고 자신은 개경으로 들어가 목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목종으로서는 스스로 불러서 화를 당한 셈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킨 후 대량군을 내세워 왕으로 삼았다. 이와 동시에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일당을 모두 귀양보냈으며, 1009년에는 폐위시킨 목종을 시해하였다. 강조가 오랫동안 고려 조정을 어지럽혔던 천추태후 ·김치양 일파를 숙청한 일에 대해서는 백성의 지지를 받았으나, 그를 믿고 불러들인 죄 없는 목종을 시해한 일과 또 스스로 정권을 잡은 일에 대해서는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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