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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래산제일봉
봉래산제일봉22.09.03

백제의 의자왕은 왜 폭군, 암군으로 불리고 있는건가요?

백제의 마지막 국왕인 의자왕 있잖아요. 해동증자로 불릴만큼 총명한 국왕이라 불릴때도 있었는데 삼천궁녀등 폭군 혹은 암군이라 불리는데 백제의 의자왕은 왜 폭군, 암군으로 불리고 있는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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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2.09.03

    안녕하세요. 똘똘한뱀눈새148입니다.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왕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이기는 어렵지만, 의자왕은 유독 사치와 향락에 빠져 백제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난을 한 몸에 받아왔다.


    백제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역사서가 전하지 않고, 백제와 적대관계였던 신라에 흡수 통합된 뒤 신라인의 시각에서 전하는 적장의 모습이기에 부정적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왜곡의 정도가 유난히 심했다.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삼천궁녀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의자왕의 궁녀였던 3,000명의 여성들이 사비성이 함락되자 낙화암에 몰려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것 같았다는 전설은 매우 인상적이다.


    그러나 당시 사비성의 인구가 5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또 조선시대에도 궁녀의 수가 최대 600명 정도였다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사비성에 3,000명의 궁녀가 있었다는 건 믿기 어렵다. 또한 당시 기록 가운데 삼천궁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조선 중기 시인이었던 민제인의 [백마강부]라는 시에서 ‘궁녀 수 삼천’이라는 말을 처음 찾을 수 있는데, 이는 문인들이 문학적 상징어로 이해해야 한다.


    이후 지금까지 대중가요에 삼천궁녀를 소재로 한 노래들이 수십 곡 불리면서 의자왕은 3,000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방탕한 왕으로 왜곡되었다. 그러니까 삼천궁녀는 방탕했던 호색 군자라는 의자왕의 이미지를 완성시킨 후대인들의 상상력일 뿐이다.



  • 안녕하세요. 하널사랑입니다. 집권후 15년 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후 정국을 이끌었다 신라를 공격해 영토를 확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집권 15년이 지나면서 여색과 향락에 빠져 충신을 멀리하고 대이관계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면서 망국의 왕으로 기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