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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08.25

의자왕은 성군인가요? 아니면 사치와 향락에 빠졌던 무능한 왕인가요?

예전에는 의자왕이란 말을 들으면

삼천궁녀부터 생각이났습니다

그런데 의자왕이 해동의 증자로 불리울 만큼 명석했던 왕이었다는 말도 있는데 의자왕은 역사적으로 어떤 왕이라 평가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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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자왕(義慈王)은 백제의 제31대 왕이자 마지막 왕으로 재위 기간은 641년~660년이다. 집권 후 15년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고 정국을 이끌었습니다.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당과 거리를 두면서, 신라에 대한 공세를 강화해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의자왕대 후기는 655년부터 660년(의자왕 20) 백제 멸망까지입니다. 이 시기 의자왕은 자신감이 지나쳐 자신의 뜻대로 왕권을 행사했다. 또한 왕비인 군대부인 은고를 지나치게 총애하여 충신의 간언을 듣지 않고 사치와 향락에 빠지기도 했다. 은고는 요부 또는 요녀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실권을 장악하고 정치를 좌지우지하여 백제가 “스스로 망했다”라는 평가까지 이끌어낸 인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의 불안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정치를 주도하던 좌평 세력들은 대거 축출되었습니다. 의자왕에게 주색의 금지를 간언하다가 하옥된 성충(成忠)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대신 의자왕은 왕서자 41명을 좌평에 임명하고 이들에게 식읍을 내리는 조치를 취한다(657년, 의자왕 17). 이로써 6명이었던 좌평의 정원제가 철폐되고, 왕족이 정치의 전면에 재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달솔의 관등을 가진 세력들이 정치적으로 성장해 좌평을 대신하는 등 정치세력의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이와 더불어 태자가 부여융에서 부여효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이 또한 정치세력의 교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파행으로 백제는 급변하는 대외관계에도 기민하게 대처할 수 없었습니다. 당과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공격하려는 움직임이 구체화되고 있었지만, 의자왕은 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전쟁을 예견한 성충이 죽음에 이르러 그 대책을 올렸지만 의자왕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이후 백제에서는 백제의 멸망을 암시하는 징조들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여우가 궁궐로 들어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 위에 앉는다거나, 서울의 우물물이 핏빛으로 변하고, 사찰에 벼락이 떨어졌다. 급기야 귀신이 궁궐 안으로 들어와 “백제가 망합니다. 백제가 망한다.”고 외치고 땅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때 땅속에서 글귀가 나왔는데, 의자왕은 이것을 백제 쇠망의 징조로 해석한 무당을 죽이고 반대로 해석한 사람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의자왕 말기의 백제는 내부적으로 무너지며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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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41년에 임금의 자리에 오른 의자왕은 백제의 부흥을 위해 애썼습니다. 그는 지나치게 힘이 커진 귀족들을 쫓아내 왕권을 튼튼히 했고, 신라를 공격해 영토를 넓혔습니다. 김춘추의 딸과 사위가 지키던 대야성을 함락했는가 하면,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와 당의 교통로인 당항성을 공격했습니다. 또한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신라 서쪽에 있는 7개의 성과 한강 유역에 있는 30여 개의 성을 되찾았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잦은 전쟁과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귀족들과 갈등을 빚으며 위기를 맞았습니다. 자신에게 바른말을 한 신하인 성충을 감옥에서 굶겨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인 660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왔고, 백강 전투황산벌 전투에서 패하면서 순식간에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웅진성으로 피했던 의자왕은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그는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고 얼마 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의자왕 - 백제의 부흥을 꿈꾸었지만 끝내 나라를 잃은 마지막 임금 (한국사 사전 3 - 나라와 민족·기구와 단체·역사 인물,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박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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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자왕은 즉위 후에 실정을 거듭하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을 타락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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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의 마지막 왕 의자왕은 어린 시절,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일컬어지기도 했으나 말년에 방탕과 실정으로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초대 온조왕으로부터 이어진 백제는 멸망하였고, 의자왕을 비롯한 왕족들과 수많은 백성들은 당나라 낙양으로 끌려갔 습니다. 결국 나라를 망치게 한 왕이니 무능한 왕이라는 후대의 평가는 어쩔수 없는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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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자왕은 서동인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왕으로 해동의 증자라고 불리웠습니다. 백제 31대 마지막 왕으로 망국의군주이기에 시호를 받지 못했으며 말년에는 사치와 향락에 빠져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백제는 멸망하였으며 의자왕과 왕족들은 낙양으로 끌려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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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안경국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자왕"이라는 표현은 보통 한국의 조선시대 왕 중 하나인 조선 선조(太祖) 왕건(王建)을 가리키는 별칭입니다. 그의 통치기간은 1392년부터 1398년까지였습니다.


    조선 선조 왕건은 조선을 성립하고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그는 조선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통치는 조선 초기의 중요한 사건과 정책들을 모색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사후에 "성군"이라는 시호(諡號)를 받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의자왕"은 주로 선조 왕건을 가리키는 존경의 의미를 가진 표현으로 사용되며, 그가 단순히 사치와 향락에 빠진 무능한 왕으로 평가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통치는 조선의 초대 왕조를 세우고 국가의 기반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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