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구활노비란 무엇을 뜻하는 건가요?
조선시대에 노비 종류도 여러가지 인듯 한데
구활노비란 무엇이었나요?
그리고 조선시대 노비 종류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구활노비 정책은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에서
국가의 사업을 민간에게 위탁해서 운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구활 노비는 진휼 정책의 차원에서 시행된 일종의 빈민 구제책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환곡, 진제장 등 가난한 사람을 진휼하고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제도적으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하거나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유랑하는 사람이 급증하면 국가의 상시적인 정책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 국가에서는 개인에게도 사회적 책임을 일정 부분 부과하였습니다.
즉, 그들에게 빈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권장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특별 해택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정책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구활 노비’였습니다.
구활 노비 정책은 경제력이 있는 개인이 굶주린 사람을 데려가 먹여 주고 살려 주면,
양측 당사자 간의 합의 하에 그리고 관의 공증 절차를 거쳐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구활 노비(救活奴婢)는 진휼 정책의 차원에서 시행된 일종의 빈민 구제책이었습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환곡, 진제장(賑濟場) 등 가난한 사람을 진휼하고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제도적으로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하거나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유랑하는 사람이 급증하면 국가의 상시적인 정책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 경우 국가에서는 개인에게도 사회적 책임을 일정 부분 부과하였다. 즉, 그들에게 빈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권장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특별 해택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의 정책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구활 노비’였습니다. 구활 노비 정책은 경제력이 있는 개인이 굶주린 사람을 데려가 먹여 주고 살려 주면, 양측 당사자 간의 합의 하에 그리고 관의 공증 절차를 거쳐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였습니다.
원래 국가에서는 개인이 양인을 노비로 억압하는 것을 ‘압량위천(壓良爲賤)’이라 하여 불법 행위로 규정하고 엄격하게 다스렸다. 구활 노비는 이러한 국가의 기본 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평민의 노비화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노비제가 해체 붕괴되어 가고 있는 상황 한편에서 새로운 노비가 창출되고 있던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다.
1594년(선조 27)에 실시된 구활 노비 사목(事目)은 대표적인 시행 사례이다.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하고 생업을 잃고 유랑하는 백성들이 증가하자 이들을 구활하면 관의 공증을 거쳐 노비로 사환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구활 노비 사목이 시행된 바로 그 해 경상도 진보현(眞寶縣)에 거주한 진성 이씨 이정회가(李庭檜家)에서는 국가의 정책에 부응하여 유랑민을 구활하였다. 다음은 1594년 11월 이정회가에서 진보관에 공증 절차를 거친 문서이다.
이정회가에서 유랑민을 구활하게 된 계기는 그 집안의 노 매읍금(每邑 金)이 횡성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제천 근방에서 아이들 셋을 만나면서였다. 그들은 9살 순개(順介), 7살 추양(秋陽), 7살 막분(莫粉)으로 오늘날 초등학교 1학년쯤 되는 어린아이들이었는데, 부모 없이 유랑해 떠돌다가 길가에 굶주려 쓰러져 있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매읍금이 안쓰럽게 여겨 먹을 것을 나누어 주자 아이들은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진보현 북면에 피우(避寓)하고 있던 이정회의 집까지 따라갔다. 이정회가에서는 이들을 거두어 양육하고 그 해에 반포된 사목 내용에 근거하여 구활 노비 입안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출처: 우리역사넷 구활노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광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활노비는 양반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노비가 아닌)을 도와줄 경우, 쌍방간의 합의 하에 도움을 받은 사람을 노비로 인정해 주는 제도였습니다.
노비는 크게 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눌수 있고
그 안에서 또 선상노비,납공노비 그리고 솔거노비,외거노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공노비의 종류로는
- 관청수공업자, 서리, 직업군인, 사령, 오작사령, 다모, 무수리, 관기가 있고
사노비로는
- 물담사리, 쇠담사리, 똥담사리, 안잠자기, 교전비, 취비, 찬모, 새답비, 침모, 유모, 문안비, 곡비, 방기, 수노, 간노가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구활 노비(救活奴婢)는 진휼 정책의
차원에서 시행된 일종의 빈민 구제책이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환곡,
진제장(賑濟場) 등 가난한 사람을
진휼하고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제도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구활 노비 정책은 경제력이 있는 개인이 굶주린 사람을 데려가 먹여 주고
살려 주면, 양측 당사자 간의 합의 하에 그리고 관의 공증 절차를 거쳐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였다.
-출처: 우리역사넷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노예(老老)는 가족이나 타인에 의해 노예로 팔려간 노인을 가리켰다. 이것은 종종 노인을 부양할 수 없는 가족을 지원하거나 빚을 갚는 방법으로 행해졌습니다.다른 노예와 달리 노년의 노예는 종종 육체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고 대신 가사 하인이나 관리인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들은 하급 노예로 간주되었고 일반적으로 다른 노예보다 더 관대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전히 노예에 관한 법률과 규정의 적용을 받으며 소유자의 변덕에 따라 사고 팔 수 있습니다.
노인 가족을 노예로 파는 관행은 조선 왕조를 개혁하고 현대화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9세기 중반에 결국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노령노예의 유산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계속 느껴지고 있으며, 많은 가족들이 여전히 노인들을 적절한 보살핌을 제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활 노비 정책은 경제력이 있는 개인이 굶주린 사람을 데려가 먹여 주고 살려 주면, 양측 당사자 간의 합의 하에 그리고 관의 공증 절차를 거쳐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를 말합니다.
즉, 먹고살기 힘들어진 시기(전쟁, 가뭄 등)에 굶주린 사람이 늘어나면서 나온 제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구활 노비(救活奴婢)는 진휼 정책의 차원에서 시행된 일종의 빈민 구제책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국가에서는 환곡, 진제장(賑濟場) 등 가난한 사람을 진휼하고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제도적으로 갖추고 있긴 했지만 그러나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화하거나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유랑하는 사람이 급증하면 국가의 상시적인 정책만으로는 한계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 경우 국가에서는 개인에게도 사회적 책임을 일정 부분 부과하였습니다. 즉, 그들에게 빈민 구제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권장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특별 해택을 주었다고 하지요. 이러한 국가의 정책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구활 노비’였습니다. 구활 노비 정책은 경제력이 있는 개인이 굶주린 사람을 데려가 먹여 주고 살려 주면, 양측 당사자 간의 합의 하에 그리고 관의 공증 절차를 거쳐 노비로 삼을 수 있도록 허용한 제도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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