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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2

과거 거란이라는 나라는 얼마나 강성하였나요?

우리 민족과는 고려시대 때 많이 싸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란이 그토록 강성하였다면 고려에서 그렇게 결사적으로 전쟁을 벌였을까 싶고 거란에서 그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당시 서북부에서 주로 싸웠지 고려 전국이 초토화되지는 않았잖아요? 그런데 거란에 밀려 중국 왕조가 뒤로 밀려났다는 이야기도 있어서 혹시 거란이 가장 강성했을 때 어느 정도의 국력을 가졌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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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리함
    누리함23.08.12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거란의 종족적 기원문제는 오늘날 전문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아직 뚜렷한 정설은 없지만 몽골계 방언을 사용한 종족으로 추정되고 있다. 거란족의 본거지는 동몽골지역의 요하유역(遼河流域)으로 기원후 4세기 말부터 중국사서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래로부터, 동몽골지역은 북아시아의 유목민족과 중국 화북지역의 농경민족의 생활권이 서로 만나는 곳이기 때문에 그 남북에서 생성된 정치적 세력이 강대하게 되면 그 침입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양자간의 격렬한 각축장이 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거란사는 크게 세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의 시기는 국가건립 이전의 시기(4세기말~907년)이다. 이 시기는 거란이 남방에서는 후연(後燕), 북연(北燕), 북위(北魏), 동위(東魏), 북제(北齊), 수(隋), 당(唐)등의 중국왕조들과 북방에서는 유연(柔然), 돌궐(突厥), 회흘(回紇)등의 유목국가들의 강대한 세력에 압박되어 이들에 대해 신속(臣屬)과 이반(離叛)의 역사를 되풀이했던 시기이다.

    중국사서에 따르면 이 시기의 거란은 최초 분산된 부족단위로 존재하다가 5세기 중엽에 8부연맹체가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거란의 8부연맹체는 5세기말 거란의 성장을 의식한 고구려와 유연의 공격으로 해체를 가져왔다. 거란은 북조의 분열 및 유연의 쇠망으로 일시 부흥의 기회를 갖게 되지만 6세기 중 후반 돌궐의 강성과 이로 인한 동방진출로 인해 돌궐에 복속되었다.


    이후, 거란은 581년 수에 의한 중국통일과 돌궐의 내홍(內訌)으로 인한 583년 돌궐제국의 분열로 인해 돌궐의 지배에서 이탈하게 되었고 수의 지원아래 거란의 제부족들은 그들의 고지로 귀환하게 되었고 10개의 부족집단이 연맹된 10부연맹체가 성립되어 그들 사이에는 연맹체를 다스리는 군장(君長)이 등장하게 되었다. 사료에 따르면 각부의 수령은 대인(大人)이라 불리웠고 8부의 대인들이 모여 연맹체를 이끄는 가한을 선출했다고 전한다.

    두 번째의 시기는 야율씨족(耶律氏族)에 속하는 아보기(阿保機)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배경으로 새로운 거란의 지도자로 등장해서 907년 제부족들을 통합해서 강성의 기회를 갖게 되면서 이후 거란족은 북중국을 점령해서 요라는 정복왕조를 성립시켜 중국을 지배했던 시기를 지칭하는데 907년 제부족 통합에 성공한 아보기는 먼저, 동몽골지역의 중요세력이었던 해(奚), 여진(女眞), 실위(室韋)등을 복속시키고 거란의 부족들을 18부로 재편하고 대거란국(大契丹國)을 국호로 국가를 성립시켜 그 자신은 태조(太祖)로 등극했다.


    이후, 그는 924년 크르그즈를 공격해서 그들의 몽골고원의 지배를 종식시켰고 926년에는 만주의 발해(渤海)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동단국(東丹國)을 건설하였다. 한편, 아보기가 이룩한 가장 큰 문화적 업적은 란문자의창 제라 할 수 있다. 거란문자는 부분적으로 위구르문자의 요소를 갖고 있지만 한자계통에 속하는데 대자(大字)는 920년, 소자(小字)는 924년에 만들어졌는데 거란문자는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못했다.


    927년 요굴지(耀屈之) 즉, 태종(太宗)이 등극한 후 거란은 중국이 5대시대(907~960)로 분열된 틈을 타서 장성이남의 경영에 착수하는데 성공했다. 즉, 당시 중요 군벌세력중의 하나였던 석경당(石敬瑭)을 도와 후당(後唐:923~936)을 멸하고 후진(後晋:936~947)를 성립시켜 그 대가로 거란은 연운16주를 얻어 오늘날의 북경지방을 포함하는 중요지역을 직접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947년에는 과거 거란족이 할거하던 동몽골지역에 흐르는 강명(江名)의 한자를 따라서 왕조명을 요(遼)로 채택하기도 했다. 특히, 요조는 제6대 황제인 성종 재위기에 이르러 최극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960년 송의 건국으로 일정기간 양국간의 정립관계가 계속되다가 성종은 대대적인 군사원정을 감행해서 1005년에 요는 송과 역사적인 전연회맹(澶淵會盟)이라는 일종의 불평등조약을 체결해서 완전한 정치적,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게 되었다.


    아울러, 그는 내정개혁을 단행해서 정치조직과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법전을 편찬, 공포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이로 인해 요조의 명성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당시 아랍세계로 까지 전파되어 약59개국이 요조에 조공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성종의 뒤를 이은 흥종(興宗)과 도종(道宗)시대에 이르러 요의 조정내에는 보수파와 개혁파사이의 갈등이 표출되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 들었고 이와 아울러 거란족의 급격한 한화도 진행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 1029년 거란의 속민이었던 발해와 여진이 반란을 일으켰고 12세기 초에는 거란의 판도 내에 거주하던 여진족들은 변경밖에 거주하던 생여진(生女眞)과 연합을 했고 급기야 1125년 여진과 송조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요조는 멸망하게 되었다.


    세 번째의 시기는 요조가 멸망한 후 거란의 지배계층 중의 한사람이었던 야율대석(耶律大石)이 거란의 잔여무리를 이끌고 서천해서 트랜스속시아나(Transoxiana)지역의 후스오르다 즉,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공화국의 추(Chu)강 유역의 벨라사군(Belasagun)을 중심으로 서요국(西遼國, 黑契丹:1132~1211) 즉, 카라키타이(Karakhitai)를 건설했던 기간이다.


    야율대석은 ‘전세계의 칸’이란 뜻의 ‘구르 칸’(Gur Khan)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면서 재위기(1125~1143) 동안 국가의 영토를 중국국경에서 아랄해(Aral Sea)에 이르는 지역까지 확장시켰다.

    서요에서는 지배층이었던 거란인의 수효가 작았기 때문에 복속지역은 그 지역의 해당영주에 의해 다스려졌고 이들은 서요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구르 칸’에 조공을 했다. 서요는 1211년 멸망했는데 제국의 동쪽지역은 당시 칭기스칸에 복속되었던 나이만(Naiman)족의 왕자인 큐츌룩에 의해 점령되었고 서쪽지역은 하레즘샤의 무하마드에 의해 점령되었다.

    출처 : 투르크 인문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