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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6.22

버마 아웅산은 어떤 인물이 안나요

버마 아웅산은 암살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떤 인물이었기에 그 딸이 대통령이 되고 국가원수가 되는지 아웅산의 인생이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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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얀마(버마)의 독립운동가, 정치가이자 미얀마의 국부입니다.

    존칭인 '보조 아웅 산'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여기서 '보조'는 버마어로 '장군'이란 뜻입니다.

    또한 아웅 산 수 치의 아버지이라고 합니다.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고 영국군이 버마를 재점령하자, 아웅 산은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애틀리-아웅 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버마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 독립을 쟁취하기 전인 1947년 7월 19일, 아웅 산의 형을 포함한 7인의 장관들과 함께 양곤 사무국 건물에서 임시 내각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버마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건 물론이거니와 버마 통합을 실현하려던 인물이었기에, 현 미얀마 국민들은 물론이거니와 군부조차도 국부로 추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딸인 아웅 산 수 치가 30년 넘게 미얀마 군부에게 대항하며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을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정권 시기에 겪은 탄압이 가택 연금으로 끝난 것이 안타까움으로 남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웅산은 1932년 양곤대학에 입학했으며 4년 뒤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했습니다. 1940년 영국의 체포령이 내려지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중국 하이난성에서 버마 독립군을 양성, 이후 일본의 도움으로 버마에 다시 돌아와 영국군과 싸웠습니다.

    일본은 괴뢰정부인 버마국을 세우고 영국보다 더욱 가혹한 통치를 시행하여 버마인을 비롯한 인근 국가에서 동원해온 민간인의 피해가 극심했고 이에 아웅산은 30인의 동지와 함께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을 결성, 일본에 대한 저항운동을 했습니다.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망하고 영국군이 버마를 재점령하자 아웅산은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애틀리- 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 버마 독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고, 독립을 쟁취하기 전인 1947년 7월 19일 아웅산의 형을 포함한 7인의 장관들과 함께 양곤 사무국 건물에서 임시 내각 회의를 진행하는데 아침에 군복을 입고 톰슨과 스텐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4명의 괴한이 지프를 타고 사무국으로 들이닥쳤고 이들은 경호원들을 죽이고 회의장으로 난입, 총기를 난사합니다.

    아웅산을 비롯한 5명이 그자리에서 즉사, 3명은 치명상을 입었지만 살았고 이후 영국 식민정부는 임시내각의 총리였던 우 소를 비롯한 8명을 암살의 배후로 지목, 체포하고 버마 임시 대법원에 이들의 재판권을 넘겨주었고 우 소는 억울함을 항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9명 모두 이듬해 처형당했습니다.

    그의 암살로 버마의 운명은 독립 이후부터 삐걱댔고 이후 버마족과 카렌, 카친, 샨, 친, 카미 , 아라칸, 로힝야족 같은 소수민족들과 이념이 다른 정당간의 내전이 끊이지 않게 되며 동남아시아에서 혼란한 빈국으로 추락합니다. 독립 이후 버마의 굴곡진 역사에서 민족, 종교, 이념을 막론하고 모두가 존경하고 버마 통합의 상징이 될수있었던 아웅산 죽음은 제일 안타까운 순간, 만일 그가 죽지 않고 버바 초대 대통령이나 초대 총리가 되었다면 지금같은 내전, 쿠데타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고 실제 아웅산은 버마족 출신이었지만 카렌, 샨, 카친 등 소수민족들에게도 관대했으며 팡롱 협약이라는 미얀마 내 소수종족들의 자치와 권익을 보장하는 협정을 체결하기도 했습니다.

    버마 독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고 버마 통합을 실현하려던 인물로 현 미얀마 국민, 군부조차 국부로 추앙합니다.

    그래서 딸인 아웅산수치가 30년 넘게 미얀마 군부에게 대항하며 민주화 세력을 구심점으로 지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정권 시기에 겪은 탄압이 가택연금으로 끝난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부 미얀마의 마구에현(縣) 나마우시에서 출생했다. 1932년 양곤대학에 들어가, 1936년 동맹휴학을 지도하였다. 같은 해 미얀마 전국학생연합의 초대 서기장에 뽑혔고, 1938년에는 독립을 표방하고 나선 급진정당인 타킨당에 입당, 서기장이 되었다.


    영국 당국의 체포령이 내리자 1940년 8월 일본으로 탈출하여 미얀마 공작기관의 스즈키[鈴木] 대좌(大佐)의 원조를 약속받고 하이난[海南]섬에서 미얀마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미얀마독립의용군을 이끌고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에 침입, 바 마우가 이끄는 임시정부(1943~1945)의 국방장관이 되었다. 1944년 8월 반(反)파시스트 단체인 인민자유연맹(AFPFL)을 조직, 1945년 연합군의 반격에 호응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후 AFPFL의 총재가 되어 총독의 행정참사회에 참가하였고, 1947년 1월 런던에서 영국 총리 C.애틀리와 아웅산 간에 ‘애틀리-아웅산 협정’을 맺음으로써 미얀마독립을 위한 제1보를 내디뎠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19일 양곤의 회의실에서 행정참사회 회의 중 형을 포함한 6명의 행정참사회원과 함께 암살당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 안녕하세요. 조형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웅산은 미얀마에서 유명한 정치 인물이고, 현대 미얀마의 주요 건국자라고 불리울 정도로 명성이 대단합니다. 그는 영국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을 하기 위한 국가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아웅산의 리더십과 노력으로 반파시스트 민중자유동맹(AFPFL)이 형성되고, 결국 1948년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독립반파시스트 민중자유동맹(AFPFL)의 형성과 결국 1948년 버마의 독립으로 협상까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웅산은 1947년 7월 19일 암살당했습니다. 그의 유산을 물려받아 그의 딸인 아웅산 수치가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