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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08.31

우리나라 바둑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고 싶어요

바둑은 놀이를 떠나 하나의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런 바둑은 언제부터 시작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요 바둑의 역사와 유래가 알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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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3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바둑의 기원이 궁금하군요.

    바둑은 문자가 생기기 이전인 4,300여년 전에 발생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고증은 없습니다.

    옛날 하(夏)나라 걸왕(桀王)이 석주(舃胄)에게 명하여 만들었다고 하고,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이 아들의 지혜를 계발해주기 위하여 바둑의 오묘한 술수를 가르쳤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둑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시기 역시 확실하지 않으나 우리나라의 바둑사는 삼국시대부터 더듬어볼 수 있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바둑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중국 고대에 요 임금이 망나니였던 자신의 아들의 수양을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있습니다.

    요 임금은 신화적인 인물로 실존인물인지는 의심스러우나 적어도 춘추시대에 바둑이 존재한 것은 확실하며 가장 유력한 추측은 상나라 중기~ 주나라 초기 시절 이미 원시적인 바둑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에 바둑이 전래된 것은 삼국시대로 보인다.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에'호위기 투호지희(好圍棋投壺之戱)'라고 하였고, 《후주서(後周書)》 '백제전'에 '잡희연 대상혁기(雜戱然大尙奕)'라 하여 모두 바둑을좋아하고 잘 두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에는 조야에 바둑을 잘 두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으며, 가장 오래 된 기록으로 《삼국사기》의 '백제본기(百濟本紀)' 개로왕조(蓋鹵王條)에 나오는 중 도림(道琳)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한창 국세를 확장하고 있던 고구려의 장수왕은 남쪽으로 뻗어내려가려고 하였으나, 지금의 경기 광주(廣州)에 도읍을 정하고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던 백제가 방해가 되어 여의치 못하여 호시탐탐하던 중, 고구려에서도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도림이 백제의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장수왕에게 아뢰어 첩자가 되기를 자청하여 백제에 거짓 망명을 하였다.

    백제에 와서 개로왕과 바둑을 두면서 친하게 되자 도림은 개로왕에게 진언하여 왕릉·성곽 등을 개수하도록 하고, 그 결과 국고를 탕진시켜 백성들의 민심을 잃게 하였다. 이 보고를 들은 고구려는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치자, 패배한 개로왕은 피살되고 태자 문주(文周)는 몇 사람의 심복과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도망가 임시 도읍으로 하였다.

    《삼국유사》 괘관조(掛冠條)에 따르면, 신라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하기 전 왕자로 있을 때 신충(信忠)과 함께 대궐 안 잣나무 아래에서 바둑을 두었다. 왕자는 신충이 어질고 현명한 데 마음이 끌려 '후일에 내가 만일 그대를 잊으면 저 잣나무가 증언해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후 성덕왕 36년에 부왕이 승하하자 효성왕이 왕위에 올랐고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는데, 신충이 빠져 있었다. 이에 신충은 못내 섭섭함을 이기지 못하고 잣나무에 글귀를 써서 붙였다. 그러자 잣나무가 말라죽고 말았다. 효성왕은 이상히 여겨 잣나무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거기에서 신충의 글이 발견되었다. 효성왕은 놀라 '내가 국사에 골몰하다가 그만 그대와의 언약을 잊을 뻔했구나'하면서 신충을 불러 작록을 내리고 그에게 국사를 맡겼더니 잣나무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여성들도 바둑을 즐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대의 문호 이규보(李奎報)는 평양 기생 진주(眞珠)가 바둑이 상당한 고수임을 알고 한판 두기를 바라는 내용의 시를 써서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에서 국수라고 하는 고수들 가운데 유명한 사람은 조선시대 정승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다. 그는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자주 어울려 바둑을 두었는데, 당대 제일가는 고수로 알려졌다.

    또한 이순신 장군도 평소 바둑을 즐겼다는 것을 《난중일기(亂中日記)》를 통해 알 수가 있다. 근세의 국수급 인사로는 김만수(金萬壽)를 빼놓을 수 없다.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국기라고 하면서 바둑을 즐겼는데, 김만수가 바둑을 잘 둔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다가 함께 바둑을 둔 결과 대원군은 번번이 지고 말았다. 김만수의 사람됨이 괜찮아 일반 상노계급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던 대원군은 김만수를 의성(義城) 고을의 사또로까지 임명하였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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