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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혹한 쇠똥구리
고혹한 쇠똥구리23.12.31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전염병에 대응하였었나요?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전염병이 걸리게 되면 고치기 정말 힘들었을꺼 같은데 조선시대에는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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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2.3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 전염병을 어떻게 대응했는지가 궁금하군요.

    전염병의 발생에 즈음해서 많은 사람들은 우선 역귀 때문에 무서운 전염병이 발생한다고 믿었습니다. 불교에 의한 인과응보설이나 유교적 배경에서 나온 운기불화설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의 유행은 귀신의 조화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전염병이 많이 돌 때는 여제를 드렸습니다. 실제로 이와 같은 여제에 쓰였던 제문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편찬된 각종 의서를 보면 계절이나 기후의 변화 때문에 전염병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실제로 『향약집성방』 제5권에 보면 절기가 고르지 못해서 추위와 더위가 심하거나 좋지 않을 경우에 전염병을 일으킬 수 있는 기운이 생겨나고 이와 같은 기운이 전염병의 유행을 만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염민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염병에 걸린 백성들을 격리시켰으며 옷이나 생활용품을 태우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한의학을 사용해 치료하고자 하기도 하였답니다.

    감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전염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달래기 위해 국가적으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이를 위해 전국에 여제단이 설치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전염병 감염자들은 무인도에 모으거나 한데 모으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죽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영조는 대신들을 불러 전염병을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중지를 모았다고 하는데 영조는 먼저 국왕의 직속 사법 정보기관인 의금부를 불러 각 지방에 경력(의금부 내 종사품 관직)과 군사 3개 초(약 백 명 단위의 군대를 편제)를 파견해 병자의 이동을 통제하고 이어 활인서에 병자가 얼마나 있는지 확인했는데 조선 시대에는 도성 내 환자를 구하는 업무는 활인서에서 했다고 합니다. 혜민서는 의약품 지급 및 일반 백성을 돌보는 역할을 했는데 무엇보다 활인서에 병자들이 어떤 규모로 어떻게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대신들은 활인서에 병자들이 총 몇 명이나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영조는 혜민서의 병자들을 성별 및 연령별로 파악해 일각 단위로 보고하라고 호통쳤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는 혜민서를 통하여 약제 등을 공급하기도 하였으며

    일정 지역으로 강제격리도 하기도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