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프랑스는 헨리 5세와의 전투였던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부분의 종친 및 대귀족들이 사망하자 샤를 7세 때부터 쉽게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백년 전쟁 후 영토가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종친 및 대귀족들은 거의 살아 있었기에 이들은 서로의 영토를 둘러싸고 부딪칠 수밖에 없었으며, 왕권에 대한 다툼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백년 전쟁 후 돌아온 병사들 중 농토로 복귀하지 못한 자들은 무리를 지어 종친과 대귀족의 수족 역할이나 사병으로 전락했다. 이것이 잉글랜드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겪어야 할 마지막 과제였다.
물론 이러한 과제는 종친 귀족들이나 대귀족들에게 국한된 것이지 일반 국민들과는 무관한 것이었고, 이들 왕실 귀족들도 자신의 권력을 전쟁 후 국민의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국민들과 엄정한 중립을 지켜야 할 형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잉글랜드 왕이던 헨리 6세가 1440년에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의 설립과 케임브리지 대학 내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의 웅장한 예배당을 건립하다가 파산했고, 1453년경에는 그의 외조부인 프랑스의 샤를 6세의 혈통 때문인지 정신 이상의 증세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때 헨리 6세의 조카벌인 요크 공이 워릭(Warwick : 국왕 제조자란 별명을 가진 자)의 지지하에 헨리 6세를 감금하고 요크가의 19세된 젊은 에드워드 4세(1461~1483년)로 등극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4세 집안은 에드워드 3세의 다른 아들의 줄기로서 흰 장미 문장을 쓰는 가문이었고, 앞서 감금된 헨리 6세도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붉은 장미 문장을 쓰는 랭커스터 가문의 자손이었다. 이로써 두 장미 문장을 쓰는 왕실 집안의 추종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사병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기에 이를 '장미 전쟁'이라 부르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미 전쟁 (영국사, 2003. 11. 10., 김현수, 위키미디어 커먼즈)